리라 라이즈벨의 끝내주는 밤
푸솜
22-09-23 03:08
18
깊은 밤, 또 어스름한 새벽.
리라 라이즈벨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리라 라이즈벨은 적막이 내려앉은 복도를 걷고, 또 걸었다.
―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마련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리라 또한 그것을 아주 잘 알았다. 리라는 숱한 이별을 경험했고,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으로, 남으로, 또 그 이상의 무언가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았다. 제가 살던 라이즈벨은 우정도, 배신도, 기쁨도, 사랑도, 슬픔도, 생명도, 죽음도. 그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곳이었으니까.
허나 당신은, 구태여 무언가의 "끝"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상상을 해서 마음을 다잡은 적이 있는가?
리라는, 없었다. 모든 만남과 이별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다가왔으며, 또 멀어졌다. 리라는 그 어떤 형태의 이별이든 전부 준비된 적이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란 늘 슬픔만을 불렀다. 더 이상 그런 슬픔을 되풀이하긴 싫었다. 무엇이든, 결론을 내야 했다. 지금 걸음을 옮기는 까닭은, 그런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각, 또각, 또각. 사용인들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새벽. 일정한 소리로 울려 퍼지는 구두 굽 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깨트렸다. 목적지는 분명했다. 애초에 제 것이 아닌 이 넓은 저택에서 제가 향할 곳이라고는 몇 되지 않았으므로. 발렌틴의 방문 앞에 도달한 리라가 두어 번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짧은 답을 들은 리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발렌틴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불청객을 맞이했다.
" 발렌틴. "
" 왜, 안 자고. "
" 발렌틴은 왜 저를 도왔습니까? "
" 갑자기 들어와서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대답해 주세요. "
어쩐지 재촉하는 말투에 발렌틴이 책에서 시선을 떼고 리라를 마주했다. 그 순간, 그는 리라의 눈에 어린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불안감을 발견해버려서…….
때문에, 발렌틴은 그 질문에 순순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 ……마침 필요했을 뿐이야. "
" 의도도 불분명하고, 누가 봐도 초라한 행색이었던 저를요? "
" 네가 라이즈벨이란 걸 첫눈에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
" 제가 라이즈벨이라 거둔 겁니까? "
" 그게 아니지,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리라는 말을 멈췄다. 그를 추궁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단지. ……제게는 무언의 확신이 필요했을 뿐.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이. 더 이상 적이 아니라는 확신이. 그래, 이를테면, 무언의 관계가 되었다는 확신이…….
" ……. "
"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분명히 해. 아니라면 꺼내지 말고. "
짧은 생이나마 리라는 그 스스로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의 꼴은 어떠한가? 흔들림 없는 사람에게, 저는 무엇이 불안하고 초조해 그를 추궁하고자 이 밤에 걸음을 옮겼는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펼쳐진 모습은 제가 너무나도 잘 아는 헬레니아의 일상 그 자체라. 제가 그동안 너무나도 지키고 싶었던 풍경이라. 리라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제 마음을 뱉어내면 그 풍경이 깨어질 것만 같아서. "무언가"를 탐내면, 지금의 관계마저도 잃어버릴까 봐서.
" 제가 떠날 때, 발렌틴은 마중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
" 희한한 부탁을 다 하는군. 이유는? "
" 끝이라고 생각하기 싫어서요. "
" 뭐, 그럼, ... 그러지. "
용건이 끝났으면 가 봐. 예.
다시 걸음 소리가 울렸다. 허나, 걸음은 안을 향하지 않았다. 그 답을 들은 순간, 리라 라이즈벨은 이곳이 '헬레니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도. 이 라이즈벨이라는 이름은, 저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라고. 그러니, 이제 이 일탈을 끝낼 시간이 된 것이라고. 그것을 자기만 모르고 있었다고…….
사람은 가진 것 없이 와 가진 것 없이 떠난다고 했던가.
어느 날 조용히 헬레니아에 온 리라는 마찬가지로 조용히 헬레니아를 떠났다.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났음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생동한다.
리라 라이즈벨에게는 그 간극이 너무나도 애달프게 다가와서, 바닷소리가 울리는 방 안에서 눈을 감았다.
오피셜이라기보단
그냥 이렇게 헤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
... 걍 그렇구나~ 하고 넘기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