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의 꽃말을 알고 있나요

w. 레멘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든 낮에는 떳떳하게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자들이 모여드는 거리가 있다. 공기에는 향락이 짙게 스며들어 있고 폭력으로 인한 피내음이 일상적으로 풍겨오는 곳. 어떤 제재도 없이 거래되는 약은 잠깐의 쾌락과 끔찍한 절망을 반복하게 하고, 번쩍거리는 낡은 싸구려 네온사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는 고일 대로 고여 퀴퀴하기까지 한 공간. 간간이 들려오는 고함을 따르는 총성. 옆집의 누군가가 어쩌다가 죽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일상처럼 술 한잔에 흘러가는 어두운 골목. 그러나 이곳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돈이 오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거리는 막을 수 없는 병폐이자 금맥이다.

그러니 이 위에 뒷골목의 왕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

여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누군가의 앞에 서 있었다. 콘크리트로 대충 마감한 바닥은 요철로 우둘투둘했다. 워커가 부딪힐 때마다 낡고 질 낮은 바닥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그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언제 어디서나 첫인상은 중요한 법이다.심지어 그것이 적대조직에서 정보를 들고 와 가입을 원한 인간이라면 더욱이.

코끝이 차가웠다. 이 한겨울, 난로 하나 틀어놓지 않은 작은 거점에는 입김이 풀풀 뿜어져 나왔다. 닦지 않은 창문에는 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천을 우겨넣고 그 위에 두꺼운 커튼을 덮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요즘 시대에 쓸법한가 싶을 정도의 작은 램프를 가져다 놓고, 빛을 약하게 조절해놓은 것이다. 먼지가 쌓인 구식 컴퓨터가 웅웅거리며 돌아갔다.

얼굴에 칼집이 난 남자가 서류를 성의 없이 책상에 툭 던졌다. 원본이 담겨 있던 USB는 일찌감치 누군가가 가지고 간 지 오래였다. 꽤 긴 시간을 공들여 보던 조직원은 담배를 입에 물고 약간 눌린 어조로 말했다.

“꽤 고급 정보로군.”
“거짓은 없습니다.”

미끼로 내걸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구역을 뺏을 정도는 아니지만, 뒷골목― 황금의 거리의 세력구도를 바꿀 기초 정도는 될 수 있다. 이 정보에 거짓이 없다는 전제 하에. 남자는 검은 머리의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군인마냥 딱딱한 자세를 한 인간이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외양에 기세가 날카롭지는 않은데도 무거움이 있었다. 뻗친 단발 사이로 보랏빛 눈이 한 점의 의심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거리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의 보스가 이 조직을 일궈낸 것도 10대 시절의 일이 아니던가. 정보를 주축으로 삼아 성장한 조직에서 정보를 경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다만 찜찜함을 버릴 수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도, 조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그의 역할은 아니다.

“기다려라.”

남자는 담배를 비벼 끄고 몸을 일으켰다. 윗사람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담배가 어둠 속에서 빨갛게 재만 남기고 식어갔다.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지만 자세에는 한 점의 빈 틈도 없었다.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여자, 리라 라이즈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서야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허물어졌다가 금세 바짝 당겨졌다. ‘조심해야지.’ 약하게 보여서 좋을 것은 없다. 그녀의 특기는 정치도, 능수능란한 말솜씨도 아닌 무력이었다. 같은 나이대에서는 경험 이외에서는 비교할 만한 사람도 많지 않을 터였다.

손 안쪽에 난 땀을 느끼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총은 빼앗겼지만, 허리띠 안쪽에 숨겨둔 칼은 건재했다.

‘넘어오겠지?’

그녀가 가져온 것은 황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탐낼 만한 것이었다.

황금의 도시는 모험가들의 망상으로 치부되었지만, <황금의 거리>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 거리에서 생산되는 부는 나라가 가장 부강했을 때 거둬들인 세금을 상회한다. 금과 보석으로 두른 장신구와 비단과 태피스트리로 집을 장식하고, 눈과 귀가 시끄러울 정도의 파티를 365일 지속해도 남아돌 정도로.

그렇다면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금은 어디서 오는가? 그 부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 금은 무기와 약, 무게가 다른 화폐와 술, 환락 사이에서 오며 그 부를 지배하는 자들은 다섯 개로 나뉘어 영역 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리라 라이즈벨이 속한 조직은 그 다섯 중 하나였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가지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리라의 조직은 그 본능에 가장 충실한 조직일 것이다. 국가가 독주하는 황금의 거리를 좌시하지 않고 무력과 법으로 통제하고자 시도했을 때 조직은 그에 반발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뒷손들과 연합하여 통제를 포기한 치외법권으로 만들고만 굴지의 조직이기도 했다. 다만 그들 중에 가장 세가 약했다. 그것이 요즘 떠오르는 정보조직에 스파이를 보내게 된 이유였다.

다만 조직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리라의 행동일 것이었다. 리라 라이즈벨이 가져온 것은 진짜 정보였다. 조직의 간부가 내민, 잘 꾸며진 가짜가 아닌 진짜. 리라가 접근할 수 있는 등급의 정보 중에서는 가장 윗급이지만 당장 자신의 조직을 무너뜨리지도 않고, 동시에 신뢰를 얻기에 적합한.

마음이 불편한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 리라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찬기가 있는 옷감이 손 끝의 거스러미처럼 버석거렸다. 이것은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리라는 성실하게 조직을 위한 칼로 자라왔다. 조직에 대한 충성은 명백하다. 그러니만큼 이 뒷골목에서 신예처럼 떠오르는 정보조직에 가짜를 들이밀어서는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리라 라이즈벨의 직감은 동물과도 비슷하다. 이제 막 약관을 앞두고 있을 나이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감을 믿었다. 이 거리에서는 특히 그래야 했다.

그녀는 이것이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연히 발끝을 툭툭 바닥에 두드리던 리라는 곧 자세를 바로 했다.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흐트러진 적도 없었다는 듯이 정돈된 모습이 되었다.

그는 약간의 못마땅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뭔가를 던졌다. 리라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낚아챘다. 칼이 나가지 않은 것은 적의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던진 것은 작고 둥근 뱃지였다. 옷깃 뒤에 달아도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내부에 어떤 꽃이 그려져 있었다. 리라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떤 꽃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익숙하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보스가 널 써보시겠다고 하는군.”

건조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 옳았다는 말과 같았다. 리라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조심스레 놓았다. 뱃지가 부서질까 걱정됐다. 그렇게 쉽게 망가질 리가 없었지만 리라는 뚫어져라 뱃지를 내려다보았다.

“뚫어지겠군.”
“철은 사람의 시선으로 뚫리지 않습니다.”
“…….”

남자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골 때리는군. 그렇게 생각했으나 남자는 말을 더 얹지는 않았다. 그들의 보스가 결정한 일에 토를 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가방을 던졌다. 그러고는 손을 내저었다. 축객령이었다.

단단한 표정 안쪽에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성공적으로 잠입했다는 사실에 고양감이 차올랐다. 이제 정보를 캐내어 보내고, 신뢰를 얻어 조직을 무너뜨릴 일만 남았다. 라고 생각했다.

§

푸른 기가 남은 하늘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새벽이었다. 어디선가는 하루를 마무리할 때이고, 어디선가는 아주 이르게 하루가 시작되는 때였다. 방 안으로 어두운 기가 남은 빛이 스러졌다. 창가에는 보랏빛과 흰빛을 교차해서 만든 얇은 커튼이 달려 있었다. 암막의 역할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해가 일찍 뜨는 여름이 되면 새벽에 일이 끝나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을 뜨게 했다. 게다가 낡은 창문은 외풍이 심하게 불어서 겨울의 온종일과 가을의 새벽녘에는 커튼이 코끝을 간질여 잠을 깨운 적도 있었다.

굳이 커튼을 바꾸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이 방의 주인이 사소하고 섬세한 것에 신경 쓰기 보다는 눈앞에 닥친 것을 돌파하고 완수하는데 집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필요를 부정하지는 않고, 종종 귀여운 것을-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약간 어긋난, 예를 들어 파리지옥 같은- 들여놓기는 했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방의 주인이 어딘가의 황제가 된 장군마냥 쪽잠으로라도 스스로의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이에게도, 요 몇 건의 임무는 대단한 피로를 안겼다.

오늘의 새벽은 단잠을 깨울 정도로 서늘하고 불친절했다. 며칠이고 잠들어도 피로를 전부 덜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고, 몸은 착실하게 기상시간을 지켰다. 리라는 잠든 채 몸을 일으켰다.몸에 밴 습관이었다. 아직 눈을 감은 채였고, 실제로도 깨어난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비칠거리며 마른 나무 바닥을 밟고 화장실로 향했다. 삐걱거려서 밤에 몰래 빠져나가기 어려운 낡은 집은, 수압은 괜찮았지만 보일러가 제멋대로였다. 차갑다 못해 얼음장 같은 물을 얼굴에 끼얹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울 안에서 빤히 쳐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눈에 띄지 않는 보랏빛 머리가 눈에 띄었다. 등을 덮을 정도의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섰다. 눈 밑에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차가워서 닿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뻣뻣해지는 것만 같은 수온으로 씻은 후 리라는 짐을 챙겼다. 손때가 묻은 총, 손에 익어 다른 칼을 생소하게까지 만드는 칼 한 자루, 칼도 총도 없을 때 사용하는 너클까지. 검은색 너클 위에는 갈색 가루가 말라붙어 있어서, 리라는 대수롭지 않게 그를 털고 닦아냈다. 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창밖에는 해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리라는 스트레칭을 쭉쭉했다.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풀렸다. 몸에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쉰다. 일할 시간이었다.

꽃집 겸 카페 <아이리스>는 적당히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가게였다. 아주 번화가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만큼 가격대가 쌌고, 카페의 음료는 맛이 좋았다. 세시는 아이리스의 주인이었다. 직원 하나와 알바생 하나를 두고 일했다. 신원불명의 손님들이 자주 오가고, 험악한 자들도 많았음에도 늘 친절한 사람이었다. 황금의 거리와 거리가 멀지 않은 만큼 중립을 지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 덕분에 처음에는 단속을 하던 경찰들도 그만두고 종종 눌러앉아 도넛과 커피를 먹고 농땡이를 피우다가 떠나고는 했다.

세시는 플레인 베이글과 직접 만든 레몬딜 버터, 커피 한 잔을 내려서 테라스로 들고 나왔다. 거기에는 꾸벅꾸벅 조는 단골이 앉아 있었다. 머리끝이 약간 얼어붙어 있었지만 결은 나쁘지 않았다. 세시는 부러 소리를 내서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리라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아직도 반쯤 꿈나라에 있는 것 같은 얼굴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안 잤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입가를 가리키자 리라는 마술사의 지시에 따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입가를 훔쳤다. 축축한 것이 덜 마른 머리카락 때문인지 침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된 리라의 얼굴이 혼란스러워졌다. 리라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에는 찬물이 아니라 선인장 가시에라도 찔려봐야 할까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시침을 뚝 떼고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오자 세시는 웃으면서 베이글이 담긴 접시를 툭툭 두드렸다. 포슬포슬한 베이글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베이글을 우물거리기 시작하는 리라를 흐뭇한 눈으로 보던 세시는 그녀의 앞에 앉았다. 친절하고 상냥한 꽃집 겸 카페의 주인은 느긋한 어조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었다.

“리라. 일주일이나 출장을 간다며? 저번에 데브라가 그러던걸.”

빵이 영화처럼 툭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것보다는 덜 놀랄 텐데. 나라 잃은 표정을 보며 세시는 안타까운 눈을 했지만, 말을 무르지는 않았다. 위에서의 지령은 절대적이고, 상명하복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다. 연달아 세 건을 쉬는 날도 없이 처리하고 온 리라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말이다.

“요 며칠 되게 바빠 보이네. 상사가 좀 빡빡한가 봐.”
“……네.”
“그러고 보니 요즘 꽤 큰 손이 오셨거든. 음료를 몇 개씩이나 주문해서 간다니까?”
“그렇습니까?”
“무슨 센터 같은 데를 다니시나 봐. 좋은 일 하시는 것 같아서 나도 동참할까 하고.”

세시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세시는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빵을 주섬주섬 주워드는 리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 바람이 코트 사이를 파고들었다. 따뜻한 커피에서는 김이 올랐지만, 그만큼 온건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커피 안에는 아침부터 마시기에는 제법 독한 브랜디가 섞여 있었다.

리라는 여전한 표정으로 기계처럼 손을 움직였다. 조금 베어 문 베이글을 반으로 가르고, 딜버터를 나이프 떠서 빵 위에 바른다. 미동도 없는 눈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언제 졸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졸음기 없이 깨끗한 표정이었다.

이 카페 주인의 말에는 많은 정보가 있었다. 데브라를 거쳐 내려온 명령, 상명하복을 허락하지 않는 위협적인 상하관계, 음료라는 단어로 위장한 장사, 동참이라는 임무의 성질.

매일 새벽에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을 배달해오고, 꽃다발을 만들어서 팔고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만들어 파는 이 작은 꽃집은 무엇일까? 번화가에서는 제법 멀고, 황금의 거리와는 아주 가깝지 않으며 가격과 위치 때문에 사람이 모여드는 이 가게 아이리스는.

어떤 정보조직의 거점 중 하나였다.

‘경찰들이 알면 당장 몇 년 간의 멍청함을 개탄하며 머리를 치겠지만.’

자리 잡은 지도 7년이 되었는데 의심할 생각도 못하는 점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래서 정보가 아니라 총을 무기로 삼는 놈들이 이리 한심한 것이다.

‘뭐, 그래도 잘 적응했네.’

세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리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안 지 5년이 되었다. 세시는 리라를 맡아서 조직의 전반적인 것들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써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일반적으로 정보조직은 공작능력과 강한 인내심이 필수적이다. 파견조는 육감이 뛰어나거나 눈치가 좋은 이들이 많고, 다른 경우는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정보취합이 빠르다. 하지만 리라는 이에 해당 되지 않았다. 섬세하다기보다는 송곳처럼 장애물을 뚫고 나가는데 특화된 조직원이었다. 행동대장으로 나섰다면 진즉 간부 밑에서 총애를 받으며 일했겠지만 이곳은 정보조직. 무력으로서는 원래 조직에 있었을 때처럼 두드러지기 어려웠다.

원래라면 금방 도태되어 제거되었을 테지만, 위에서도 원하지 않았고 세시도 오기가 생겼다. 수시로 바뀌는 암호체계를 학습시키고 시험한다.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끝없는 감시 밑에 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리라는 꿋꿋하게 버텨냈다. 제법 성실하게 말이다. 물론 성실하게 맡은 바를 해내는 능력 같은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적에게는 한 점 망설임 없이 향하는 총구, 아군이라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지켜내는 모습 같은 것들이 신뢰를 산다. 리라에게 호의를 보내는 이가 세시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 그를 반증했다.

‘우리 보스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5년쯤 험한 일에만 굴렸으면 신뢰를 줄 법도 한데.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세시만 해도 아픈 여동생이 인질로 잡혀 있다. 불치병이라 큰 병원에서 많은 돈을 들이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다. 여동생의 위치는 특정되어 있고, 그만한 돈을 벌 방법도 없으므로 그녀는 배신할 수 없다. 새벽마다 꽃 배달을 하는 퍼시는 지령을 하달하는 <솔리두스>의 배달부다. 그의 아내는 불법체류자였는데, 그 아내가 합법적으로 체류하도록 조직에서 손을 썼다. 퍼시가 배신하는 순간 아내는 치외법권인 접경지대로 쫓겨날 것이다. 많은 조직원들의 약점이 솔리두스의 보스에게 쥐어져 있다. 알바인 유리아도, 직원인 에셀로스도 각자 약점을 잡혀 있다. 그런데 리라는 그런 약점이 없었다. 연인은 없고, 친구는 위협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데다가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도 없어 보였다.

가족도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리라는 종종 가족들에게 잘 지낸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을 받지는 못했다.

허리춤을 매만지는 리라를 바라본다. 세시는 거기에 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세시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다섯 번 연달아 두드린 후 잠시 쉬었다가 세 번을 더 두드렸다. 15구역이었다. 리라가 지령을 외웠는지 고개를 들었다. 볼에 빵조각이 묻어 있었다. 버터를 바른 빵은 반쯤 없어져 있었다. 리라는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식사를 거른다고 일이 갑자기 잘 되는 것도 아니고, 힘이 더 나는 것도 아니다. 먹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다.

리라가 남은 베이글을 햄스터마냥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밀어넣었다. 속이 덜 찬 위에 브랜디가 든 커피가 쏟아졌다. 속이 알싸할 정도로 뜨거운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휴대폰을 확인하고 리라는 몸을 일으켰다. 알바인 유리아가 다가와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 밑에는 작은 동전이 두 개 있었다. 도금한 동전은 화폐로는 사용되지 않지만, 황금의 거리에서만큼은 행운을 의미한다. <솔리두스>에게는 또다른 의미가 있지만.

안경 너머의 장난스런 눈빛이 대금을 재촉했다. 세시는 그의 어깨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손님에게 재촉하기는.”
“힘내, 리라 씨. 누군가에게 황금을 선물 받을 수도 있잖아.”

느리게 늘어지는 말은 의미심장했지만, 리라는 어떤 의심도 하지 못한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커피와 베이글 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짐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발끝마다 따라붙는 피로를 억지로 문질러내고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러고는 군인처럼 이마에 손날을 딱 붙이고 여전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세시와 유리아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후배를 배웅했다. 거 참 우리 보스도 성격이 나빠, 같은 말이 들려왔지만 리라는 고개조차 갸웃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진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

<황금의 거리>는 국가의 병폐다. 그 말뜻은 도시 하나에 한하지 않으며, 거미줄처럼 쳐진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솔리두스>는 황금의 거리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황금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모든 장소에 지부 혹은 파견된 조직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만한 무력을 갖춘 것은 아니어서 공격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리라는 그런 공격에 대비하고 상대를 제거하는데 특화된 조직원이었다. 보스는 잠입보다는 그쪽이 어울리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리라는 옷을 찢어 팔을 단단히 묶었다. 칼이 스쳐 지나간 자리가 후끈거렸다. 평소라면 머리카락 끄트머리에도 닿지 않았을 칼이 예리하게 팔을 스쳤다. 근육이 상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땀이 볼을 타고 데구르르 굴러내렸다. 리라는 깨진 창문 밖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사람이 위에서 굴러떨어졌는데 고함만 한 번 있었을 뿐 신고하려는 시도조차 없다. 시체가 되어가는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꺽꺽 났다. 그러나 황금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밤에서는 소란조차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몇 명 남았지?’

15구역은 수도 서쪽 외곽에 있었다. 서쪽 외곽이 90-99로 행정구역을 나눈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15구역이라 이름 붙여진 것은, 이곳에 국가가 설립한 마약중독치료 센터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센터는 착복과 돈세탁 창구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일부는 정상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솔리두스는 알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매해 세탁된 돈이 어디로 향하고, 그 주인이 누구이며 돈을 누가 나눠갖는지까지…….

새삼스럽게 소름 돋을 정도의 정보력이었다. 국가의 방첩기관과 오래되고 전통 있는 조직들조차 수십 년 동안 눈치채지 못한 것을 20년도 되지 못한 소규모 정보조직이 알아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었다.

리라는 발끝에 묵직하게 채인 것의 정체를 내려다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식사를 한 사람이었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거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히죽거리는 웃음이 인상적인 문장가였다. 그는 지금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핏물이 철벅거렸다. 리라는 피웅덩이 밖으로 물러났다. 활동하는데 거치적거렸다.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문제가 됐다. 그 과정에서 누워있던 복면인의 시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밟았다. 으득거리는 소리가 나서 리라는 약간 반성했다.

직후 리라는 홀스터에서 총을 꺼내 쐈다. 소음기가 달린 총에서 푸슉하는 소리와 함께 계단께에서 누군가가 쓰러졌다.

‘둘이군.’

15구역에 도착하자마자 리라는 거한 환대를 받았다. 동전과 뱃지를 확인한 조직원은 하나의 동전을 받은 후 그녀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낡았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는 작은 하숙집에는 살고 있던 사람은 오딧세이라는 오래된 코드명을 가진 조직원이었다. 서사시를 읽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호사가들의 개인 보유고에 있는 서사시를 훔쳐 읽다가 수배자가 된 그는 수시로 바뀌는 암호문을 외우기 어려워하는 리라에게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리라는 감사함의 표시로 출장을 갈 때 오래된 고서점에 들려 종종 서사시가 기록된 책들을 전달해주었다.

총탄이 바닥을 뚫고 나왔다. 리라는 그 즉시 토스터기를 제 반대쪽으로 집어던지고 벽에 붙은 테이블로 가뿐하게 올라섰다. 토스터기가 떨어진 쪽으로 총탄이 비처럼 쏟아져 올라왔다. 육탄전이 안 되니 난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바닥에 잘못 꽂혀 목이 부러진 동료를 보기 전에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오딧세이는 웃으며 집주인에게 그녀를 조카라고 소개한 후 식사를 대접했다. 부엌을 빌려 직접 요리를 했다더니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몇 주간의 피로가 한 번에 날아가는 맛이었다. 그는 스몰 토크를 하며 정보를 넘겼다. 리라는 종종 나이프를 접시에 부딪힐 정도로 집 중했다가도 ‘고기가 아주 잘 자란 것 같습니다’, 같은 소리를 했다.

주변의 그래피티를 답사하러 나온 길거리 예술가란 소리를 했기 때문에 리라는 의심을 크게 받는 일 없이 주위를 탐사했다. 며칠동안 그녀는 주변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일반인이라면 드나들기조차 꺼려질 폐허의 펜스 위에서 센터에 드나드는 수상한 물자의 흐름을 확인하기도 했다. 오딧세이가 죽은 것은 그녀가 파견된 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늦은 저녁의 일이었다. 싸구려 간판에 불이 늦게 들어와 서쪽은 화염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불길한 하늘이라 일찍 책을 덮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때가 잔뜩 탄 발 사이로 총구가 나타나 9mm 총알을 쏟아냈다. 탄창 하나를 다 비우기도 전에 생명이 스러졌다. 그보다 더 안쪽의 방에 머무르고 있던 리라가 반응하는데는 단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른 이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지만, 스스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호흡에 열이 챘다. 그러나 머릿속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냉정은 목숨을 지킨다. 게다가, 그녀는 스파이다. 그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면 칼을 쥐는 손에 이렇게까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무전은 막았는데.’

그녀는 손에 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칼을 다시 잡았다. 몸의 근육과 숨을 통제했다. 다음을 대비하는 행동이었으나 후속이 없었다. 엇박으로 습격할 생각인 걸까? 하지만 고민하고 있어 봐야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라 리라는 계단으로 향했다. 몸을 드러내는 대신 작은 테이블을 밑으로 집어던진다. 억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동그라졌다. 비명은 하나였지만 리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남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자세를 잡고 있었다. 리라는 총을 쳐내거나 칼을 찌르지 않았다. 대신 몸을 낮게 숙이고 상대의 머리를 잡은 채 벽에 틀어박았을 뿐이었다. 대단한 힘이었다. 체격이 아주 큰 것도 아닌데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벽에 메다 꽂는다. 대번에 정신을 잃은 남자는 낡은 벽을 뚫은 채로 기절했다. 그와 동시에 리라는 플로어로 고개를 돌리면서 총구를 향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리라의 예상을 벗어난 광경이었다.

타오르던 저녁은 이미 어둠 속으로 숨었고, 새파란 달이 떠 있었다. 깨진 창문과 찢어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그 앞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백금발이 빛에 반짝거렸다. 음영에 가려진 회색빛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남자는 총을 아래로 향하게 한 채 들고 있었다. 잘 손질된 새 총이었고, 아주 파괴적인 위력보다는 장전과 발사 간의 시간 차이를 줄이는데 집중한 것이었다. 방아쇠가 가벼워서 사고율이 높을 정도로.

그의 앞에는 사람이 누워있었다. 둘 중 하나일 터였다.

리라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뒤늦게 황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황금의 거리>에서 <황금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황금의 거리에서 무기도 약도 주조된 화폐도 환락도 아닌 정보로 영역을 빼앗아낸 솔리두스의 수장.

발렌틴 헬레니아가 입을 연다.

“처음이던가?”

그것은 첫 만남이었다. 5년을 꼬박 채우고, 몇 달이 지나 늦겨울. 남쪽은 벌써부터 동백이 졌다. 거북이도 이보다는 빠르게 계절을 맞을 텐데. 하지만 리라는 혀를 차거나 이맛살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어진 상황에 불평을 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병사의 역할이 아니다.

“꽤 괜찮은 정보를 팔았었지. 계기가 없어서 제법 눈여겨 봤었는데.”

앞뒤를 자른 말을 이르는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가시가 있는 말투였다. 그러나 리라에게 긴장은 없었다. 외려 맥이 탁 풀렸다. 너무 약해보였다. 그녀보다 강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허접한데.’ 세시가 좀 더 포장하라며 몇 번이고 말한 속마음이 표정으로 툭 튀어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 정보도 빼돌릴 것이 뻔해 보였거든. 목적은 있는데 약점은 안 드러내는 놈들이 대체로 그렇지.”

총구가 구멍이 난 벽을 툭툭 쳤다. 5년 만에 만난 보스가 한 손으로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해 보이다니. 실망을 포장하며 리라는 무던한 어투로 대답했다. 전투의 열기가 약간 남은 목소리였다.

“제가 정보를 빼돌렸을 때 당신이 몰랐다면, 솔리두스의 간판은 내려야겠지요.”
“내가 모른다고 하면 네가 그 진위를 구별할 수나 있나?”

우습다는 듯이 속을 한 번 득 긁는다. 발렌틴의 표정은 거만하다기보다는 오만하다는 단어가 더 어울렸다. 도발 같은 것은 먹히지 않을성 싶어 보였다. 리라는 약간 욱하는 기분으로 빠르게 대꾸했다.

“의심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제 헌신이 여전히 의심할 거리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능력도 거기까지인 거겠죠.”

5년이나 굴렸으면 제대로 써보라는 말이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발렌틴은 다리를 하나 앉은 자리에 올렸다. 그러고는 그 위에 팔꿈치를 대고는 턱을 괴었다. 늘어진 권총이 위험하게 흔들렸다. 리라의 눈가가 약간 꿈틀했다.

“이번 신입은 칼을 삼킨 모양이지. 못하는 말도 없군.”


“5년이 수습기간일 줄은 몰랐군요.”
“5년이면 짧은 거지, 네게는. 다른 놈들은 그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리라는 깊게 심호흡했다. 발렌틴은 그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5년이나 몸을 드러내지 않았던 수장이다. 굳이 약점도 없는 일반 조직원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시험해보겠다는 증거. 그녀는 신임이 필요했다. 이 말은 승부수나 다름없다.

“어차피 저만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부 믿을 수 없다면, 저 하나라도 써보시지요. 칼은 쓰는 사람 나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마저도 못 쓸 거라면 정보 조직의 보스로서 자격이 없다는 직구에, 발렌틴이 코웃음을 치는 것처럼 소리를 냈다.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감정변화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발렌틴이 총을 들었다. 리라의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총구는 그녀를 비꼈다. 리라는 뒤늦게 뒤에서 신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벼운 방아쇠가 당겨졌다. 총탄이 회전하며 튀어나갔다. 볼을 긁고 머리카락을 휘날린 총탄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남자에게 날아갔다. 벽에 처박혔던 남자가 외마디 비명도 없이 거꾸러졌다.

볼이 따끔했다.

발렌틴이 몸을 일으켰다. 리라는 몸을 바로 했다. 발렌틴이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무거운 나무 향이 났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어디선가 클럽이 축제라도 하는지 아주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왔다. 밖에는 데브라가 서 있었다. 아주 가끔 몸을 드러내던 간부급 중 하나였다. 그녀는 친근하게 중절모를 들어서 인사했다.

“태워.”

익숙한 명령에 데브라가 다른 조직원과 함께 하숙집에 뒷공작을 위해 들어갔다. 발렌틴은 차에 탔고, 리라는 그 뒤를 따랐다. 좋은 차였다. 앞좌석과 뒷좌석을 나누는 창문이 올라왔고, 썬팅이 된 탓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운전기사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을 알 리는 없었다. 고요가 찾아왔다. 지나치게 무거운 침묵이었다. 리라는 하나 남은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완수를 뜻하는 두 번째 동전은 영원히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오딧세이인데도.

데브라가 앞좌석에 탔다. 바퀴자국을 지우며 차가 출발했다.

잠시 뒤 황혼이 다시 온 것마냥 불길이 일었다. 하숙집에는 책이 많았다. 이제 오래된 서사시를 찾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건 좀 씁쓸한 일이었다.

§

여태까지 솔리두스의 보스는 수도보다는 외부로 리라를 파견을 보내왔다. 마치 중심점에서 거리를 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라는 인내했다. 치즈의 겉면을 갉작거리는 생쥐처럼 정보를 긁어내 암호문을 보냈다.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조직은 정보공작에 능숙하지 않다. 섣불리 연락했다가 정체가 특정될까 거리를 두고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큰 정보라면 반드시 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발렌틴의 신임이 아주 절실했지만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이쯤 되면 객지에서 죽으라고 파견 보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리라를 부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5년 만의 부름이 ‘신임받는 조직원’으로 계급 상승이라니.

리라의 마음은 심란해졌다.

그것은 보스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간부도 비슷했다.

‘어딜 봐도 감시지만.

데브라는 솔리두스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래된 간부급의 조직원이었다. 데브라는 탁월한 육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을 파악하고 분석하는데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 영능력자인 척 적당히 한탕 땡겨 먹었다가 수배가 걸릴 정도였으니 그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단한 감의 소유자는 자신의 보스와 샛별처럼 반짝거리는 후배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기묘한 신경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후배는 아주 딱딱한 자세를 한 채 서 있었다. 데브라는 혀를 내둘렀다.

리라는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2층 건물의 창문을 훌쩍 넘어왔다. 그런데도 후배의 호흡은 아주 약간만 불규칙했다. 임무가 끝나자마자 왔을 텐데도 말이다. 쉴 시간도 주지 않은 탓에 워커에는 핏물이 끈적거렸고, 와이셔츠 깃은 절반 정도가 잘려있었다. 볼에는 피가 튀어 있었는데 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충 휘갈긴 글씨가 적힌 보고서는 보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발렌틴 헬레니아는 악필에 가까운 글씨를 무리 없이 읽었다. 데브라는 읽을 자신이 없었 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툭 두드리다가 멈춘다. 발렌틴은 찻잔을 들었다. 그가 직접 우린 것이었다. 발렌틴은 홍차 한 잔 우리는 것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 찻잎을 들여오면 그 장부를 전부 대조하고, 공수한 이가 누군지 확인한다. 차를 마시기 전에는 은으로 된 티스푼을 담가 본다. 훌륭한 경계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발렌틴의 주위에는 기밀 서류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데브라는 독하다고 생각했다.

‘서류는 안 보여주시면서 옆에는 계속 둔단 말이지.’

임무를 나가면 수작 부릴 시간도 주지 않고 보고하게 시키고, 임무가 없으면 기밀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회사 건물 주위를 호위하게 시키거나 사람을 붙인다. 그녀는 이제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맡기는 임무의 등급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리라가 그 모든 임무를 성공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 과정에 조직원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제법 놀라운 일이다. 리라의 친화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데브라는 리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처음에는 음료를 내미는 손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던 리라는 다소 과격한 접촉에도 순순히 따라주게 되었다. 데브라는 리라를 이끌고 문밖으로 나갔다.

“잠을 못 잤나 봅니다. 눈 밑이 시커먼 게 팬더 같군요.”

데브라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건넸다. 리라는 선 채 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엎어져서 카펫이 되는 것도 고려사항에 있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몇몇의 조직원들이 밖에서 하품을 하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자가 맡은 범위에서 그 하부까지는 전부 파악하고 있는 간부급 혹은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꽤나 살가웠다. 몇 번의 임무를 거치며 리라는 이들이 정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보스가 예민하게 굴어? 새삼스럽진 않지만.”
“보스에게 예민하다고 하는 건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들키면 추가 고발할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너무하네, 데브라.”

그들은 시답잖은 뒷담을 하고 있었지만 리라는 잠자코 있었다. 데브라가 등을 팡 쳤다. 격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다 두 배로 맞는거 아닙니까? 한 소리를 하는 간부의 정강이를 발로 찬다. 아, 그렇잖아요. 우리 중에 리라보다 센 놈이 어딨어요. 데브라는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엄지로 밖을 가리켰다.

“식사합시다. 요 앞의 샌드위치 집은 어떻습니까? 점장이 정신이 번쩍 나는 음식을 매일매일 특식으로 내놓고 있다더군요.”
“정신이 번쩍 나다 못해 관짝에서도 일어날 것 같은 맛이던데. 어떤 놈이 샌드위치에 고추냉이를 넣지.”
“난 괜찮던데~”
“취향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피로함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카펫이 되는 대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무기를 들어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손동작이나 투닥거리는 수준에서 그치는 대화. 안위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제법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리라는 본능적으로 조직을 떠올렸다. 여태까지 단 한 번의 답신도 없는 조직을.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리라는 술렁이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이 여름이 다가오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닻이 연결된 쇠사슬은 점점 녹이 스는데, 그것을 눈치채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음은 파도에 몸을 맡긴 부표처럼 흔들린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뒷목에 절로 땀이 늘어 붙는 계절이 되었을 때 발렌틴이 책상을 두드리는 속도는 늦어졌다. 발렌틴은 리라가 있는데도 종종 찻잎을 꺼냈다. 보통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브라가 히죽 웃으면 약간 짜증스럽게 찻잔이 달그락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꽃향기가 났고, 리라는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나서 그 차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낙차 때문에 가속도가 붙는 것처럼 리라의 적응은 아주 빨랐다. 신뢰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쌓이는 것처럼 보였다. 관계는 돛을 펼친 범선처럼 순조로웠다. 그녀가 어떤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가을이 왔다.

§

리라 라이즈벨은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멍한 정신 속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창백한 빛의 백열등이었다. 줄 하나에 위태롭게 매달린 전등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두 개로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숨이 코끝을 타고 들어왔다. 어둡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시야는 빛이 번져 있었다. 초점이 없는 눈이 주위를 살피며 정보를 느리게 재구축했다. 창문은 없고, 문은 철로 되어있으며 비명은 어디로도 기어나갈 수 없는 방. 오래된 피의 냄새와 음습함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녀가 속해 있는 조직은 건물 밑에 어떤 공간을 두고 있었다. 그곳에는 종종 비명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그곳에서 처리해야 할 시체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이 고문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이 막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움찔했다. 손톱 밑은 엉망이었고, 제대로 잠들지 못한 정신이 몽롱했다. 어디서 피가 나는지도 짐작할 수 없다. 원래 강건한 몸이 아니었다면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가의 고문 전문가였던 조직원은 일을 아주 잘했다.

리라는 느리게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구름이 잔뜩 긴 거리. 일교차가 커 으슬으슬한 공기. 안개가 많이 낀 거리는 가시거리가 짧았다. 인도에 바짝 붙어 걷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제법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왜였더라…….’

겨울을 다섯 번 넘기고, 여름이 지나 다시 가을이 올 때까지 그녀에게는 어떤 답도 주어지지 않았다. 안위를 걱정하는 말도, 우려도, 수고를 치하하는 말 한 마디도 없다.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문을 끝없이 두드리는 기분이 어떻겠는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일이다.

그녀는 어떤 울타리 안에서 자랐다. 스무 해 가까이를 그곳에서 자랐지만 체온은 철의 온도보다 낮았다. 무기의 화약 냄새가 손에 밸 정도로 났다. 그러나, 따뜻하고 살가운 분위기가 아니어도 춥지 않게 자랄 수는 있었다. 아주 풍족한 삶은 아니었으나 모자라고 주리지도 않았다. 사랑이 넘치지 않는다고 해서 애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 준 마음을 거두기에는 정이 많았을 뿐이다.

‘그래. 편지를 썼어.’

그러니 당연한 수순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낙엽이 켜켜이 쌓인 가을날처럼 마음이 쌓일대로 쌓여서 다른 곳으로 쏟아졌을 뿐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매듭은 철처럼 단단하지만 끊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들과의 연은 여기까지입니다.]

말은 매듭을 끊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이 편지는 마지막 방점이었다. 편지는 우체통을 통하지 않고 항상 접선하던 장소에 놓였다. 거짓으로 칠해 둔 스파이짓에 끝을 고하게 될 터. 마냥 낙관적이지는 않아도 희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누군가와 만나고 말았다.

‘아, 들켰었지.’

익숙한 낯이었다. 어제는 같이 임무에 나갔었고, 리라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조직원이었다. 그녀에게 고맙다고 의지가 된다고 했었으나 작금의 표정은, 글쎄……. 눈의 여왕도 이보다 차갑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 표정의 진위를 알기도 전에 기절했다. 온몸이 버적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테이저건이라도 맞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되새김질할 여유조차 없었다.

“…….”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감각은 정확하지 않았다. 리라는 항상 믿음직하던 팔다리의 움직임에 의심을 가졌다.

리라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어떤 정보를 팔았는지였다. 그 다음으로 들은 것은 어느조직 소속인지 묻는 것이었다. 질문은 끝없이 이어지고,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한다면 스파이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백도 인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침묵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잠시간의 소강은 상황을 복기해주었으나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리라는 꽤 시간이 지났을 것이라 짐작했다. 제가 태어나고 난 조직도, 아이리스도 둘 다 판단을 충분히 마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럼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비명을 참느라 어금니가 깨진것 같았다. 입안이 껄끄러웠다.

리라는 눈을 몇 번 껌뻑였다.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조금 더 고문이 이어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부연 시야에 피가 묻은 가위와 송곳, 스테인리스 그릇. 그리고 백열등 아래서 서슬 퍼런 빛을 머금은 금발이 눈에 보였다.

리라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또한 하극상이지 않던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리라는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는 총이 아니라 칼을 들고 있었다. 날은 날카롭게 갈려 있었지만 어떤 장식도 없었다. 길거리 잡배들이 들고 다닐 법한 잭나이프였다. 손안에서 칼이 접혔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이제 말할 마음이 들었나? 참 지독해.”

그쪽도. 리라를 뜻하는 것인지 조직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라는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지금 그녀는 깨어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발렌틴도 그를 알았다. 그는 시간과 육체의 한계를 정확하게 쟀다.

“내가 말했었지. 약점이 없는 것들은 목적이 뻔하다고……. 정확하게 증명하는군.”

비아냥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지극한 사실이다. 신뢰만으로 위에 선다고? 너무 멍청한 일이다. 머리로서 자격이 없는 일이지. 신뢰는 실체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종교가 없었다.

“제법 풀어줬던 것 같은데. 유의미한 결과는 없었군. 죽었나? 죽지 마. 그래야 대답을 듣지. 대처하기도 골 아프니까.”

잘칵거리는 소리가 작은 공간을 울렸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긴 침묵이 계속되었다. 밭은 호흡과 가끔 초점을 잃는 눈동자가 공간 안을 헤맸다. 발렌틴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고, 아주 바쁠 때의 일정은 초 단위로 짜여 있었다. 발렌틴은 드물게 한숨을 쉬었다. 나약한 놈이군. 리라가 들으면 당신에게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같은 소리를 할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고문을 지시한 당사자치고는 태평했다.

“……물 가져와.”

그래도 알 건 알아야지. 따라붙는 말에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팔을 묶어둔 구속구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발렌틴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대신 손을 대충 휘적거렸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이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

입안에 뭔가 굴러다니는 것 같다. 이를 뽑았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목소리가 제법 쉰 것 같았다. 그녀는 몇 번 쿨럭거렸다. 목구멍에 고인 것처럼 매달려 있던 피가 토해졌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발렌틴은 팔짱을 꼈다. 칼이 빛을 반사했다.

리라는 그녀는 조직원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좀 더 명징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조직원에는 그들을 부리는 보스도 포함되었다.

“믿어…… 주십시오.”

우스운 일임을 안다. 솔리두스의 조직원들이 죽어 나간 자리에 그녀가 쏟아놓은 총탄이 없었단 말인가? 강물의 표면을 뜨는 것과 같은 수준의 스파이짓이었다 한들 확신할 수 있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감정이 그렇듯이 쏟아놓은 것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정에 솔직한 리라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황금의 거리의 주민이 아니던가.

“저는, 당신의 부하입니다.”

촛불이 바람에 꺼지는 것처럼 낮아지는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칼이 접혔다. 발렌틴이 입을 뗐다.

“나는, 얄팍한 감정 같은 건 믿지 않아. 사랑이나 신뢰 같은 것들은 허상이지. 가족이라고 우기면서 황금의 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그냥 우습기만 하다. 가족인데 등에 칼을 꽂고 시멘트에 담가서 바다에 던지던가?”

그는 드물게 말을 길게 했다. 회색빛 눈에 희미한 경멸이 스쳤으나 금세 사라졌다. 그렇게 강한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배신당했다며 주변을 헤집어대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어.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런 관계를 구축하지 말아야지.”

그러니 이런식으로 그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늙은 호랑이들 같으니. 오랫동안 묵어서 언제까지나 자신의 영역이 공고할 줄 아는, 과거에 매몰된 자들. 좋은 평가가 나올리가 없었다.

발렌틴이 손가락을 까닥했다. 리라의 옆에 서 있던 조직원이 구속구를 하나 풀었다. 총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에 겨눠진 상태였다. 발렌틴은 그녀에게 칼을 던졌다. 떨리는 팔이 그 칼을 잡아챘다.

“그러니까 내게 네 충성을 증명해 봐.”

그녀는 칼을 들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위로 들어 올려졌다. 심호흡 한번 없이, 부들거리는 팔이 무색할 정도의 힘이 아래로 찍혔다. 피가 튀고, 손가락이 붉은빛으로 물든 시멘트 바닥을 굴렀다.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명확한 맹약의 증거였다. 전투에는 지장이 있을 것이다. 환지통이 종종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설임은 없다.

리라는 어떤 말도 뒤에 붙이지 않았다. 그저 똑바로 발렌틴을 바라볼 뿐이었다. 초점이 명료한 눈을 잠시 바라보던 발렌틴은 몸을 일으켰다. 어떤 감탄사 같은 것이 그의 입안을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그는 스파이를 두고 몸을 돌렸다.

리라는 그 등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멀어지는 정신이 느껴졌다. 새까맣게 암전하는 시야가 생소하다. 밑도 끝도 없는 구덩이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그녀는 잠에 들었다.

§

그녀가 눈을 뜬 것은 자신의 침대 위였다. 따뜻한 공기였다. 억지로 뜬 눈이 몇 번 꾸벅이듯 감겼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해가 중천인지 햇빛이 커튼 밑으로 쏟아졌다. 외풍은 없어 창문이 덜컹거리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이 덜했다는 점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 정도의 아픔은 없었다. 리라는 제 손을 들어올렸다. 볼 에 붙여진 두꺼운 거즈와 팔을 감싼 붕대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끝났군. 리라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에서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곧 이불 빨래를 해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데려다 놓으면서 안을 정리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나. 리라는 자신이 기억해놨던 가구의 위치, 형태 같은 것들이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킨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한동안 현장으로 돌아가기는 글렀다. 최소 한 달은 정양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리라는 쓰러지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방 안의 작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기밀 문서와 어떤 상자가 놓여 있었다.

리라는 의자에 앉아 천천히 서류 파일을 열었다. 거기에는 익숙한 사진이 있었다. 몇 해 를 보고 자란 얼굴들이었다. 그녀를 가르친 사람도 있었고, 그녀와 식사를 같이 한 사람도있었다. 입구에서 경비를 서는 사람도, 혹은 일 때문에 종종 지나치고는 했던 사람도. 리라가 속한 조직은 아무리 세가 약하다고 해도 규모가 작지 않았다. 그러니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이토록 많은 이가 전부 잠입한 스파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소름이 돋았다. 등골이 쭈뼛할 정도로의 깨달음이었다. 언제부터? 어디까지? 평생을 몸 담았던 조직원부터 간부급까지. 처음부터 들켰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리라는 전율을 느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갉아 먹히고 있었는데, 그도 모르고 으스대는 것을 보는 듯했다. 제 역량도 가늠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조직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몰락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리라는 파일을 내려다보다가 파일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검은색 박스로 된 상자를 열었다. 어떤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상자에는 전화기가 들어 있었다. 그녀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용도인지는 알았다. 아주 고가인 도청방지용 위성전화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도청의 위험 없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어 쉽게 손에 넣을 수도 없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다.

스파이의 정체와 도청이 불가한 전화기.

“…….”

리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팔을 한 번 돌리려다 그만둔다. 우득거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재활은 2주 후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회복력이 아주 좋았다. 괴물 같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 뒤에는 밀린 임무를 시작하면 그만이다.

볼에 크게 붙은 거즈를 떼어낸다. 따가움과 함께 서늘한 감각이 찾아왔다. 상처가 뜯어졌는지 피가 흘렀다. 리라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

발렌틴 헬레니아는 리라 라이즈벨을 불러들였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이침침해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리라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금세 표정을 지웠다. 그녀는 1주 전부터 다시 임무에 투입되었다. 위험도가 아주 높은 임무였지만 그녀는 군소리하지 않았다. 하기는 원래부터도 불만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턱을 괴고 있었다. 둥근 유리알 너머로 글자가 비쳤다. 발렌틴은 한참 동안 리라를 세워두었다. 데브라가 둘 다에게 보이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개인적으로 그녀는 자리를 비우고 싶었다. 하지만 리라가 삿된 마음을 먹는 순간 발렌틴의 목숨은 바로 끝이었다.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발렌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참 후 발렌틴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오늘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의외군.”

책상을 세 번 두드린다. 그러고는 멈춘다.

“이것만 들고 가도 사는데 지장이 없을 텐데 말이야. 이 김에 축출하고 지위를 보장받는 방법도 있는데.”

그런 것으로는 자신에게 어떠한 타격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참으로 오만한 남자다. 역사가 100년은커녕 30년도 되지 못한 조직의 보스. 하나의 점으로부터 모든 조직원을 부리지만, 그 근원에 끈끈한 유대감은 없다. 청렴결백한 정치인, 가족에 충실한 기업인, 깨끗하게 운영하는 종교단체의 사제까지도 약점을 잡아서 부린다.

발렌틴 헬레니아. 솔리두스의 수장.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불신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익숙한, 타고난 군림자.

“제가 있을 곳은 이곳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솔리두스의 구성원들은 이상하다. 그들은 모두 약점을 잡혀 있는데, 발렌틴에 대한 원망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복수를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구조상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 아주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측은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리라는 솔리두스를 관찰했다. 그리고 이상함의 원인을 깨달았다.

그들 중에 쓰레기를 찾자면 손에 꼽을 수준이었고, 심지어 그런 쓰레기들은 방패막이나버림패로 쓰였다. 죄가 있는 자들은 황금의 거리에서 범죄로 취급하기도 어려운 수준도 많았다. 솔리두스는 조직원의 약점을 해결하고, 그것을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한 조커 같은 것으로 바꿔두었다.

“장담컨대 당신이 이루려는 목표에 도움이 될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가 있다면 그보 다 편한 길이 없을 겁니다.”

리라는 발렌틴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쓰레기는 언젠가 동티가 난다.’ 사실이다. 그는 사실만 말해도 될 정도로 공고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절망 뒤에 희망을 보고 나면, 다시 절망을 봤을 때 다루기가 쉽지.’ 이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망가져서 발렌틴을 공격하러 온 조직원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보기에는 구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것이 약점이란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솔리두스로 저울이 기울어버린 것은.

그리고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발렌틴 헬레니아라는 우두머리에게 매료된 것은.

“시건방져.”
“손가락 하나로는 부족했습니까? 그렇다면 증명할 수 있습니다만.”

리라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데브라는 총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왔지만 그다지 의욕적이지 않았다. 발렌틴은 감봉 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멀쩡한 오른손이 책상 위에 쾅 얹혀졌다. 칼이 손가락 사이로 꽂혔다. 손잡이를 잡는 방향이 그를 향해 있었다. 얼마든지 그는 칼을 뽑아 그녀의 손가락을 자를 수 있었다. 발렌틴은 잘린 손가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의사는 이전처럼 무기를 다루기는 어려우니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 말했다. 발렌틴은 곤란하군, 써먹을 곳이 많은데 라고 대답했다. 주변에 있던 간부 중 누군가가 웃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발렌틴은 안경을 들었다. 안경줄이 흔들렸다. 잠시 바라보던 발렌틴은 안경을 쓰고 펜을 들었다.

“흥이 깨졌다.”

아직도 업무가 많았다. 그녀를 투입할 곳도 고민해야 했다.

“꺼져.”

리라는 칼을 뽑았다. 아이리스가 새겨진 칼은 아주 오래 쓴 것처럼 벨트에 수납되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책상에 올려놓고, 정중하게 인사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기름칠이 잘 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달칵, 하고 닫히는 순간. 안에서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봉 당하고 싶나? 6개월로 부탁드립니다. 1년. 저는 간부들한테 이 소식 전하러 가보겠습니다.’ 짜증난다는 듯 총소리가 몇 번 들렸지만 리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전차 같은 사람이었다. 한번 결정한 것을 무르지 않고, 성심껏 대하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를 만난 모든 조직원이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조직원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보스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냥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잘린 손가락이 시원할 정도로 아팠다.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

아이리스의 뜻을 알고 있는가? 노란 아이리스는 슬픈 소식, 보랏빛 아이리스는 기쁜 소식, 흰색 아이리스는 사랑. 색을 칠하기만 한다면 세 가지의 말을 전할 수 있는 유용한 의사전달 수단이었다. 그래서 발렌틴은 상징성을 아이리스에 두었던지도 모른다. 뭐, 보스의 생각을 중간책인 세시가 알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이리스의 사장 세시는 조직원들에게 종종 노란색이나 보라색으로 의사를 전달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 세시는 리라에게 흰색으로 된 꽃다발을 선물했다. 동생이 가지고 싶다던 장신구를 먼 곳에서 사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베이글을 먹으러 왔던 리라는 약간 당황했다. 새로운 임무 전달법인가 해서 꽃 잎을 하나 먹었다가 차갑게 식은 세시의 눈길에 조용히 꽃다발을 챙겨서 자리를 떴다. 유리아와 에셀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라의 뒤에는 같이 꽃잎을 먹었어야 하나 고민하는 신입이 스스로의 망설임에 탄복하며 그녀를 좇아가고 있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은 리라가 전담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신입은 그녀를 제법 따랐다. 리라가 발렌틴에게 강력하게 ‘유대감’을 강조하는 바람에 솔리두스는 꽤 끈끈해져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볍게 임무를 처리하고 회사로 돌아갔다. 상처가 조금 있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간단히 보고만 받으려던 발렌틴은 졸지에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물 받아야 했다. 데브라는웃다가 감봉 기간이 늘어났다. 차마 버리기도 그런 탓에 꽃병에 꽃다발을 꽂아둔다. 노란색보다는 낫군. 발렌틴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노란색이 더 나을지도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간지 30분도 되지 않아 회사 앞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총소리와 경찰들이 사이렌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나름 멀쩡한 사업체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 앞에서 총소리를 내면 조사가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는 리라에게 말리게 되었다는 생각을 애써 지워냈다. 탕탕! 거기서 서십시오! 리라 씨, 경찰이 오는데요?! 도망갑시다. 결국 발렌틴은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총을 쐈다. 소란이 회사로부터 쏜살같이 멀어져갔다.

“……피곤하군.”

시끄러운 놈을 들였다. 발렌틴은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한숨을 쉰 후 책상 위를 바라본다. 그 위에는 많은 동전이 쌓여 있었다. 피가 묻은 것도 있었고, 그냥 녹이 슨 것도 있었다. 누가 반들반들하게 닦았는지 깨끗한 것도 있었다. 공통점은 아이리스가 새겨져 있다는것이다.

발렌틴은 동전을 들어올렸다.

솔리두스는 어디로 갈까? 라고 묻는다면, 방향은 정해져 있다. 정보만으로 살아남기를 거부한 조직은 필연적으로 기득권과 이권 다툼을 하게 된다. 그들은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향상심은 그보다 높다.

무력은 키우면 그만이고 키우는 동안 필요한 시간을 버는 비용은 그들이 가진 정보로 충분하다.

그러니 그들은 뒷골목의 왕이 될 것이다. 병폐이자 금맥. 황금의 거리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발렌틴은 여전히 신뢰 따위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만, 손가락마저 잘라버리며 당신을 섬기겠다고 말하는 부하를 믿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영웅 서사시는 찾았나?”
“서부 서고에 기부라도 할까요?”

탁. 동전을 내려놓는다. 이미 속내를 꿰뚫은 간부가 발렌틴의 의중을 짐작하고 대답해왔다.

“마음대로 해.”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다. 그는 채비를 하고 모자를 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부하를 뒤로 했다.

발렌틴은 당당하기까지 한 뻔뻔함에 패배했고, 지금도 패배중이었다. 리라는. 뭐, 아주 완벽한 승리는 아니어도 승리가도를 달리고는 있는 것 같다.

이것으로 일곱 해. 또다시 겨울.

나쁘지 않은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