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바다의 파도로부터
w. 레멘
00. 서쪽 바다의 바람
화창한 날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바다괴물이 시끄럽게 포효하고 난장을 피우는 바다는 항상 험난하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바람은 소금기만 머금었을 뿐 어떤 불운한 전조도 풍기지 않았다. 어민들이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라며 배를 띄웠다. 만선의 전조였다. 닻을 올린 배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쾌속선처럼 나아갔다.
시장은 평소보다 더욱 활기찼다. 눅눅함이 다소 가신 거리 위에 왁자지껄한 호객 행위가 이어졌다. 어부를 은퇴한 노인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날씨를 맞춰 라이즈벨에 도착한 상단들이 현금을 마련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그러나 평온한 하루라고 해서 괴물들이 바다 밑에 도사리지 않는 것은 아니며 기사들의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배가 드나드는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 험난하기 짝이 없는 절벽과 암초의 시작지점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와 철판을 긁는 것과 같은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수면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것 같은 몸부림이 바다를 소란하게 했다. 뭔가를 쥐어뜯고 베고, 무너뜨리는 소음은 한참 후에야 잦아들었다. 소리의 근원지에서는 뱀을 닮은 괴물이 붉은 피를 바다 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작은 배만 골라 습격하는 악질적이고 교활한 바다괴물이었다. 뱀은 눈을 뒤집고 혀를 길게 내뺀 채 수면 위에 떠 있었다. 녹색 비늘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 위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나이대의 여성이었다. 몸의 근육이 잘 잡혀 있었고, 불균형으로 메운 사체 위에서도 균형을 확실히 잡고 있었다. 손에는 얇고 긴 레이피어를 들고 있었고, 가볍고 움직이기 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묶여 있었지만 물에 젖어 몸에 들러붙어 운신을 방해했다. 붉은빛이 물과 섞여 얼굴 옆을 타고 흘렀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밭은 호흡이 조금씩 샜다. 칼을 든 손이 입가 주변을 쓸었다. 짜다 못해 쓴맛이 났다.
괴물사냥꾼과는 다른 행색이었다. 그네들 역시 가볍고 움직이기 쉬운 차림을 고수하기는 했으나 단정하다고 보기는 대체로 어려웠다. 바닷물에 젖어 쉽게 망가지는 옷 때문에 질 좋은 옷을 입지 않는 편이어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입은 옷은 질이 좋았고, 천 위에 옅은 보랏빛 실로 정갈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또한 깊게 패인 상처가 많은 사냥꾼과 달리 손안에는 규칙적인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꽤 긴 시간 동안 숨을 골랐다. 익숙하지 않은 발판 위에서 덩치가 큰 괴물을 잡은 것이 원인이었다. 영악한 괴물은 자신에게 유리한 곳에서 싸우려 들었다. 수상경비대의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나 제법 힘에 부치는 일을 잘도 해냈다.
호흡이 안정화되고 해가 한 뼘을 움직이기도 전에, 절벽 위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리라 경!”
리라 라이즈벨은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약간 찡그려졌다. 몇 번 깜빡이자 물기가 떨어져 나갔다. 햇빛을 등지고 있었던 탓에 상대의 얼굴이 잘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코트 자락은 리라가 입은 옷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리라는 발을 몇 번 굴러 발판의 안정성을 확인한 후 몸을 웅크렸다가 폈다. 사체가 푹 꺼지더니 몸이 절벽 위로 쏘아졌다. 돌 부스러기를 몇 개 흘리며 절벽을 두 번 밟고 위로 솟구쳐 오른다.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모습에 그녀를 부른 이가 혀를 찼다. 약관의 나이에 이 정도 경지까지 도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이 기사여서야.
아직 마르지 않은 물이 머리카락과 소매 끝을 타고 떨어졌다. 지면을 짙게 물들이는 물방울에 시선을 빼앗겼던 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리라에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부르십니다.”
“어쩐 일로?”
호출할 만한 일은 쌔고 쌨지만 리라는 굳이 열거하지 않았다. 너무 많아서라기보다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쪽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태도를 곤란해하고는 했지만, 그것 역시도 리라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리라는 기사이며 그 직무를 행하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리라는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가겠습니다.”
“사체는 경비대에게 넘기겠습니다.”
“그거 압니까, 베일? 뱀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것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시종은 고개를 갸웃하지조차 않았다. 이 기사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 한 두 해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다괴물은 대체로 독을 품고 있으니 먹을 수가 없었으나 베일은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어디서 보셨습니까? 라고 말하며 먼저 발걸음을 뗐다. 물론 그녀의 매무새에 대단히 속이 아파했지만. 리라는 처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대 답했다. 책에서 봤습니다. 놀라운 일이다. 졸았지만 정확합니다. 이건 놀랍지 않다. 베일은 머릿속에서 ‘먹을 수 있다’라는 가정을 완전히 지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리라가 걷는 걸음마다 발자국이 새겨지는 것처럼 따라왔다. 철벅이던 발소리는 금세 질척한 불쾌함 정도로 남았다.
거리는 활기찼다. 내기하는 자들의 흥분이 거리를 벌써부터 메우고 있었다. 흉악한 외모의 용병들이 껄껄거리고 웃어댔지만 과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치안대는 대부분 영지의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냥꾼들과 용병들은 기사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
영지민들과 외부 상인들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지만 리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죽죽 짜면서 걸었고, 베일은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꽤 충직한 시종이었다.
한참을 걸은 후 리라는 항구 도시 가운데에 있는 큰 저택에 도착했다. 중앙의 효율적인 도량형으로 만들어진 길은 걷기가 편했다. 현 국왕의 치세 아래 정립된 단위가 가지는 힘을 어디서나 목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길과 저택은 어느 정도 괴리감이 있었다.
붉은색 벽돌을 높게 쌓아올린 저택은 위엄과 웅장함이 느껴졌다. 만약 베스텔리에에 애셜이 없었다면 서쪽의 왕궁은 라이즈벨의 저택이 되었을 것이다. 황동을 녹여 금을 입힌 종과 바다괴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밤이 되면 빛나는 진주 등대. 단단한 등껍질로 만든 창과 방패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베일은 경비병과 마주치기 전에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추적추적하게 젖은-비에 젖은 것마냥 처량하다는 뜻이었다- 리라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머리를 다듬어서 단정한 구석이라도 만들어보고 아직도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소매를 꾹 짰으며, 들러붙은 옷도 어떻게 떼봤다. 열 걸음 걸으면 원상복구 될지라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시종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이 기사를 경비병들이 모를 리 없다. 열 걸음도 전에 조금 전의 상태로 회귀한 리라를 경비병들이 익숙하게 맞아들였다. 고개를 꾸벅 숙인 그들은 오늘도 바다에 있다 오셨군 정도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새삼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급한 일이라 했었지.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사용인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고개를 숙였고, 베일이 기겁해서 그녀의 뒤를 종종종 따라갔다. 하지만 리라의 보폭에는 자비가 없었다. 몸을 단련하지 않은 시종은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제에발,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달라 읍소했지만 리라는 듣지 못하고 쌩하니 가버렸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바닥은 경쾌한 소리를 냈다.
리라의 옆으로 아치형으로 된 복도가 스쳐 지나갔다. 저택 주인의 성격을 닮았는지 진중한 분위기였다. 사용인들은 조용히 걸었고, 목소리는 낮고 속삭이는 듯했으며 절도가 있었다. 길거리와는 유리된 것처럼 다른 분위기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단이 훈련하는 소리만이 이곳에 울리는 소리의 전부였다.
곧 리라는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호화롭고 위협적인 문 앞에서 리라는 손을 들었다. 패각을 빻고 다듬어 만든 문의 테두리 안에 바다용이 칼에 찔려 죽어 있었다. 오래 전의 선조가 잡았다는 바다괴물의 일종이었다.
똑똑똑. 정확한 간격의 노크였다.
“들어와라.”
“실례하겠습니다.”
기름칠이 잘 된 문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집무실 안에는 넓은 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채광이 좋았으나 일하는 데는 방해되는 모양인지 얇은 커튼을 쳐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강해서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짙은 음영 아래 끝을 잘라둔 시가가 보였고, 한쪽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있었다. 아름답게 양각된 만년필이 종이 위를 유려하게 누볐다. 재떨이에는 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지금 시간을 고려하면 그는 잠을 자지 않았거나 아주 이르게 아침을 시작했을 것이었다.
리라는 절도 있게 섰다. 허리춤에 메인 레이피어가 덜그럭 소리를 냈다.
서쪽에서 이 남자 앞에서 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자는 드물다. 남자가 이 땅의 지배자인 까닭이다.
“리라 라이즈벨.”
묵직한 부름에 리라는 군인처럼 대답했다. 남자가 혀를 찼다. 차라리 군인이면 나았을 것을 하필 기사였다.
“아침부터 훈련이 아니라 바다괴물을 잡으러 나갔더구나.”
명백한 질책이었다. 리라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으나 남자는 그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았다.
“네 위치를 잊었느냐?”
베스텔리에의 서부를 다스리는 영지, 라이즈벨의 후계자. 작위의 세습도 아니고, 전쟁이 없어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 않았음에도 혼자만의 힘으로 서임식에 초대받을 정도의 검사.전도유망한 기사이자 백성의 올곧은 보호자.
애셜의 충복, 왕의 검, 명령을 이행하는 충직한 종.
그것이 리라 라이즈벨을 수식하는 어구였다.
“아닙니다, 아버지.”
라이즈벨의 현 영주, 브래이든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는 덩치가 컸다. 앉아 있음에도 빛을 등지면 태산 같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딸과 똑 닮은 색의 눈이 안광을 냈다. 그가 영주의 자리에 오르면서 기사 직위는 명예로운 장식이 되었다 폄하하는 자들이 많았으나 여전히 그와 칼을 맞댈 자는 많지 않다. 영지의 주인으로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펜을 휘두르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우리가 왕가로부터 받은 것을 기억하라 누누이 일렀을 텐데.”
우두머리는 합당하지 않고 올바르지 않아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심지어 애셜의 칼을 수여 받은 기사이자 서부의 지배자라면 더욱 그랬다. 그의 슬하에 있는 자식은 리라가 유일했고, 그 다음 지배자는 정해져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주 착실했는데 언제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의 칼이 지나치게 정직했음을 염려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충성심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브래이든은 딸이 못마땅했으나 마냥 구제불능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 땅의 이름은 라이즈벨이며, 바다를 요람으로 태어나 바다를 묘지로 죽는 자들의 터이다. 바다 위의 배는 모두 흔들리며 나아간다. 그러니 그 위에서 태어난 자들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표정 없는 얼굴이 창 너머를 보고 있다. 브래이든의 집무실 밖에서는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끝의 바다와 돛을 펼친 배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를 안 지는구나.”
“죄송합니다.”
무엇이 그녀를 흔들었을까? 브래이든은 숨겨둔 복잡함을 읽어내며 턱을 괴었다. 리라는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지만 그보다는 영지민들을 위한 일에 더 매진할 때가 있었다. 어떤 때는 바다괴물을 잡는 일이었고, 어떤 때는 술 취한 용병들의 싸움을 막는 일이었다. 영지의 일을 이어받기 위해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것을 자진해서 미루고, 어린 시절에 만났던 타 영지의 후계자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알아내는 것이 어려울 것도 아니지만……. 브래이든은 턱을 쓸었다.
“파랑波浪에 흔들리지 않는 배는 육지 놈들의 편견이지.”
속으로 뱀을 조리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던 리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베일이 알았다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경! 이라고 외쳤을 생각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러니 기회를 주겠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긴 그림자가 리라를 덮었다. 마치 오래전에 그들의 선조가 잡았다는 용이 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무던한 편에 속하는 리라조차 압박감을 느낄 정도의 기세였다.
서부의 지배자. 험난한 바다의 항해자, 괴물사냥꾼, 왕의 수족. 브래이든 라이즈벨을 수식하는 어구는 리라 라이즈벨을 수식하는 말보다 많다. 그는 위대한 라이즈벨의 영주이며 리라의 아버지였다.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와라.”
사춘기 자식을 풀어줄 때도 되었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느긋한 발걸음으로 리라의 앞에 섰다. 빛을 등지고 선 남자는 곶의 암초보다 단단해 보였다. 리라는 파격적인 제안에 드물게 감정변화를 보였다. 리라의 아버지는 엄한 사람이다. 그녀의 생애는 왕에 대한 충정으로 시작해 끝난다. 그 사이를 잘라내어 다른 방식으로 붙이는 것을 허락받은 적이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고, 그의 아버지가 그랬다. 애셜에게 칼로 부름 받은 때부터 쭉.
리라가 허리를 숙이려는 찰나였다. 리라는 제 간격 안으로 접근하는 위협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목적인지 가늠할 수 있었을 때쯤에는 이미 그녀는 자신의 애병을 뺏긴 후였다. 손안에서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칼을 보며 리라는 꾹 이를 사려 물었다.
“칼은 두고 가라.”
“아버님.”
남자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큰 바스타드 소드를 쓰는 그의 손에서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예기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베스텔리에에서 고금을 통틀어 찾아보기 힘든 그 검을 리라 역시 아꼈다. 그러나 이도 하사받은 것이었다. 그녀의 주인 될 자로부터.
“왕께 실례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칼은 부드러운 붉은색 벨벳 천 위에 곱게 놓였고, 천에 싸여 그보다 더 화려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으로 양각된 자물쇠가 닫혔다. 브래이든은 시가를 물고 펜을 들었다.
리라는 미련이 남은 것처럼 상자에 시선을 줬다가 이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라이즈벨의 후계자이지만 작위를 계승하기 전까지는 그의 가신이기도 했다. 바다의 라이즈벨에게 파랑은 새삼스럽지 않으나 그런 상태로 위位를 계승 받을 수는 없다. 그녀는 바다가 아닌 땅의 후계자들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새로운 바람을 느꼈다.
리라는 선원이 될 수 없다. 선장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항로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반드시.
01. 동쪽 황금의 광해
상단 솔리두스는 헬레니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상단이었다. 헬레니아는 큰 강을 끼고 있어 물품을 나르는데 용이한 데다가 영주는 교역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상인들에게 헬레니아는 천국과도 같은 곳일 터였고, 솔리두스 역시 그런 상인들이 운영하는 상단 중 하나일 터였으나……. 이들에게는 다른 상단과는 다른 특이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상단은 하나 이상의 주력을 가지고 있다. 향신료만 취급하는 상단도 있고, 진귀한 보석과 세공품을 주력으로 하는 상단도 있다. 하지만 헬레니아는 주력이라고 할 만한 상품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다양한 물품에 손을 댔지만, 수익을 아주 많이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본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사용인들과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정보길드였다면 납득 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상단이었다.
데브라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발렌틴은 보지도 않고 피곤한 낯을 했다. 그녀는 질 좋은 종이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부유한 상단이라도 단순 보고서에 고급 종이를 쓰질 않는 법이기에, 솔리두스의 재력을 가늠할 만했다. 그녀는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젊은 상단 주인에게 흥미로운 말을 전했다.
“칼잡이 하나가 상단주를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냥 치우면 될 텐데.”
하지만 그것이 됐다면 그의 바로 아래 부하인 데브라가 그에게 보고를 하러 왔을 리 없다. 그녀는 뛰어난 육감으로 일처리를 해내는 사람이다. 그녀가 상단의 칼잡이들로 해결이 안된다고 판단했다면 정말로 안 된다는 뜻이다.
“저희 소속 용병들과 상단 직속의 호위대도 박살이 났습니다. 보니까 칼도 엄청 낡고 이가 빠졌던데, 어디 가서 욕먹게 생겼어요.”
이김에 갈아치울까요? 안 그래도 세시가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였는데 갈아엎는 것도 좋다. 인력관리를 따로 전담하고 있는 세시는 제 밑의 부하들과 함께 근태를 조사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솔리두스 주변에 있는 꽃집 겸 카페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그들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다.
카페 아이리스는 발렌틴의 업적이었다.
“…….”
발렌틴은 몸을 일으켰다.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코트가 펄럭이자 데브라가 히죽 웃었다. 감봉 당하고 싶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별달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신경 쓸 게 많았다. 그가 상단을 맡은 지 얼마 안 된 것은 상관없었다. 그를 제외하면 모두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베테랑들이고, 그의 실수나 부족함을 메워주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것에 더불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경험과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내도록 자리를 지키던 솔리두스의 상인들은 그야말로 상재라며 벌어진 입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만 숫자가 오가는 일이다. 부담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난장이나 피우는 칼잡이라니. 성가셨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소리가 강했다.
그가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오딧세이는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소파 위에 기절한 채 곱게 누워 있었는데, 눈이 땡땡하게 부었지만 품에 소중히 안은 장부와 기록지는 무사했다. 문제는 그만이 아니었다. 칼 좀 쓴다 자랑하던 용병도 호위대도 1층 여기저기에 처박혀 있었다. 오늘이 휴일이라 다행히 사무를 보는 직원들은 없었지만 평일이 되면 어떤 소문이 돌지 알만했다.
발렌틴은 한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 칼의 주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행색은 남루했다. 검은 머리에는 먼지가 앉은 듯했고, 입고 있는 옷의 질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였으나 많이 헤져 있었다. 차림새는 아주 편해보였지만 짐은 쉽게 빼앗기기 어렵도록 단단히 매여 있었다. 소매치기를 걱정하는 행상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낡고 이가 빠진 칼이 들려 있었는데, 조만간 부러질 것 같았다. 거대한 체구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힘이 굉장히 강하단 뜻이었다. 저런 칼로 부러뜨리지도 않고 날려 보내기만 했다면 어지간히 무기를 잘 다룬다는 뜻이리라. 데브라가 옆에서 탐나지 않습니까? 라고 속삭였지만, 발렌틴은 무시했다.
명백한 목적이 있어 보였다. 피로해 보였지만 딱딱한 표정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사람을 날려 보내긴 했지만 크게 상한 사람은 없다. 의자가 날아가고 책상이 뒤집어지긴 했지만 그 정도야 예산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노릇이다.
“불청객.”
하지만 말이 곱게 나갈 리는 없었다. 데브라가 중절모를 눌렀다. 웃음을 참는 모양이다. 감봉 정도는 아버지께서도 허락해주시겠지. 데브라는 줄을 잘 타는 사람이었으니 그의 아버지에게도 하루가 멀다하고 감봉을 당했을 것이다. 대체로 도박으로 충당하는 모양이었지만.
여자가 몸을 돌렸다. 왕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자수정을 닮은 빛깔의 눈이 그를 똑바로 봐왔다. 아주 곧았고, 맹렬했기 때문에 그는 움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그 시선을 마주하면 순간 당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는 피해를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발렌틴은 피로를 감추지 못했다. 상인 만큼 사람을 보는 눈이 중요한 사람도 없다. 이 자가 제법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 챈 것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곳은 솔리두스 상단입니다. 손님으로 찾아왔다면 그만한 예의를……”
“일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칼을 그에게 향했다. 이게 대화하는 태도인가? 그가 좀 더 경험이 많았다면 능숙하게 대처했겠지만, 발끈하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었다. 무지몽매한 자들이야 많았지만 이토록 참신하게 그를 피곤하게 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말입니까?”
“일하러 왔다는 말과 이 상황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이 갑자기 일하고 싶다고 해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솔리두스를 우습게 보는 겁니까?
“그냥 일을 하러 온 사람이라니까요!”
숫제 높아지는 언성에 발렌틴은 어처구니를 잃고 말았다. 오딧세이가 어느 틈에 일어나서 기록지에 이 만담 같은 대화를 적고 있었다. 반드시 뺏어서 불태워야겠다. 그리고 한동안 종이 공급도 역사서도 압수다. 상단주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여자, 리라는 못마땅함이 느껴지는 발렌틴의 모습에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라이즈벨에서 떠난 것이 봄, 헬레니아에 도착한 것이 한여름이었다. 헬레니아의 여름은 라이즈벨의 여름보다 숨 막혔다. 온화한 기후라지만 항상 바람이 부는 라이즈벨과 비견할 바가 없다. 그렇지만 루엔야크나 이카르드보다도 나았다.
그녀는 발렌틴이 생각한 것보다 절실했다. 여비는 없었고, 무기는 질이 좋지 못했다. 사냥해서 끼니를 때우다가 습격 당하거나 식물을 채집해서 먹다가 배탈이 나는 것은 사양이다. 사람은 정상적인 고용 관계에서 수입을 얻어야 하는 법이다.
루엔야크와 이카르드를 거쳐왔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한 계절 동안 리라는 서부에서 북부로, 북부에서 남부로, 그 다음에는 동부로 넘어왔다. 말을 타고 달렸어도 다시 계절이 돌아야 도착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리라는 용병단에 가입을 하든, 개인적으로 용병일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한 후 아니다 싶을 때는 시간과 거리에 관계없이 빠르게 빠졌다. 북부는 배타적이었다. 남부는 호의적이었으나 기후가 맞지 않았다. 건조한 바람은 눅눅한 바다에 익숙한 그녀를 힘들게 했다.
솔리두스는 헬레니아에서도 가장 용병에게 후하게 값을 치르는 상단이라 들었다. 대부분의 용병들이 들어가기를 희망한다고. 리라는 칼손잡이를 꽉 쥐었다.
“헌병대를 불러.”
육감이 뛰어난 데브라가 오, 하고 웃었다. 그녀는 제 주인을 바라보더니 명확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닌 척 해도 아버지의 오랜 측근을 믿고 있던 발렌틴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하극상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것을 굳이 외부인에게 공개할 필요는 없었다.
“헌병대가 와봐야 더 시끄러워질 뿐입니다.
칼이 바닥을 쾅 찍자, 대리석이 비산했다. 사람에게 튀지는 않았으나 그 단단한 돌이 두부 부서지듯 깨지는 것은 확실히 진귀한 광경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에 발렌틴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헌병대와 칼을 맞댔다가는 수배되겠지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던가, 아니면 생각할 필요가 없거나. 강자가 대체로 그렇다.
‘…….’
여기가 헬레니아 한복판이란 것도, 솔리두스가 헬레니아의 것이라는 이해도 전혀 없다.
외부인, 손에 꼽힐 정도의 칼잡이, 솔리두스의 본점에 들어와 대부분을 날려버릴 정도의 강자.
짐작가는 자가 없다. 발렌틴은 원하는대로 협상을 이끌어갈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의 미숙함보다는 상성의 문제일 것이다. 발렌틴은 이 여자에게 끌려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삼켰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헌병대까지 불렀다가는 솔리두스 내부에서 억누를 수 있는 소란이 외부까지 흘러나간다.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세시가 좋아하겠군.
발렌틴은 데브라에게 손짓했다. 그녀가 어디선가 계약서를 쑥 꺼내 들었다. 어딘가에 악덕조항을 적어놓은 계약서였다. 물론 알려줄 마음은 없다. 원래 계약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용병으로 쓰기에는 신뢰가 없다. 산맥 너머까지 보내는 일도, 귀한 물건을 보호하게 하는 일도 탐탁지 않다. 이곳은 상단이 아니던가. 감시가 필요했다.
“좋습니다. 계약합시다. 대신, 호위 명목으로.”
리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보답받는 느낌이었다. 리라는 펜을 받아들고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성을 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용병 중에 자신의 성을 드러내지 않는 자가 많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우리 상단주가 일을 참 잘하지. [호위는 호위대상으로부터 헬레니아 측량법으로 1헤다르 이상 멀어지는 것을 금한다.] 중앙 측량법과 다른 걸 참 잘도 써먹는단 말이야. 데브라는 계약서를 잘 챙겼다.
리라는 손을 내밀었다. 거칠고 굳은 살이 박힌 검사의 손바닥이 발렌틴을 향했다.
“리라입니다.”
“……발렌틴입니다.”
떨떠름하게 마주 잡은 손이 붕붕 흔들렸다. 팔 빠지겠군.
“자자, 머무를 곳은 있습니까? 없다면 안내해드리죠.”
데브라가 타이밍도 좋게 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윙크를 하더니 발렌틴의 피로감을 끌고 사라졌다. 아주 능숙한 모습이었다.
“오딧세이. 누군지 찾아보십시오.”
“예이~”
“그리고 이번 교역에서 들어오기로 한 전기는 감정 후에 보내주겠습니다.”
“엇. 잠깐만, 상단주. 잠시만요!”
발렌틴은 뒤늦게 후회하는 오딧세이를 버려두고 상단 내를 둘러보았다. 엉망진창이다. 복구하는 비용은 리라의 월봉에서 다달이 깔 예정이었다. 사고를 쳤으니 그만한 값은 치러야지. 그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골치 아픈 호위를 얻었다. 어떻게 써먹을 지는 그의 몫이겠지만
하지만 어쩐지 바다냄새가 나는 칼잡이였다.
02. 겨울낯
리라는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냉기가 뼛골까지 파고들었지만 리라는 자리를 옮기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소매를 당겨 창문을 닦았다. 새벽나절에는 성에가 껴 마치 눈꽃이 핀 것 같았지만, 아침이 되었을 때는 다소 따뜻해진 기온에 전부 녹아내린 후였다. 하지만 건물 안의 난방은 따뜻해서 유리는 하얗게 메워진 지 오래였다. 리라의 눈에 동쪽 땅의 전경이 비쳤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주함이 느껴졌다. 서쪽 역시도 아침이 되면 부산스럽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다를것은 없는 모양이라 리라는 편안함을 느꼈다. 상단이 보이는 방은 아니지만 도시는 잘 보이는 숙소는 세시가 지정한 곳이었다. 아주 섬세하고 배려심 있는 선택이라 감정에 둔한 편인 리라도 고마움을 느꼈다.
따뜻하게 우린 차 한 잔을 옆에 둔 채 리라는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댔다. 브랜디를 넣어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지만 어제 술자리가 있었던 탓에 술이 당기지는 않았다. 리라는 대신 제 칼날을 만졌다. 상단의 보급용 검이지만 좋은 철을 썼고 좋은 장인이 규격을 맞춰 만들었다. 날에서는 예기가 느껴져서 잘 갈고 잘 관리하면 여느 칼보다도 좋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칼날을 매만지면 살을 베이지 않아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용감이 남은 손잡이를 잡고 리라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미 옷을 전부 갖춰 입은 채였다. 리라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 훈련을 하고 씻은 후에 밖을 구경하다가 식사를 했다. 고용주의 업무 때문에 파견을 나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리라 의 루틴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강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계절과 관계없이, 피로와 관계없이 항상 쉬지 않고 꾸준한 훈련과 자기관리를 하는 것.
혹자는 너무 스스로에게 가혹한 것이 아니냐 하기도 한다. 하지만 칼은 담금질하지 않으면 단단해지지 않는 법이다.
허리에 가죽띠를 단단히 맨 뒤 리라는 문을 열었다. 훈기가 훅 빠져나갔다. 복도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벌써 일어나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밖에서 병사 하나가 손을 들더니 살갑게 인사해왔다. 밥 먹으러 가세요? 북부 사투리가 섞인 청년에게서 김이 나는 것 같다. 그녀와 함께 새벽 훈련을 같이 하는 이였다.
리라가 들어오고, 솔리두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부 호위단과 용병들을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어떤 자들에게는 유예를 줬으나 어떤 자들에게는 가차가 없었다. 그 큰 상단의 무력을 재편성한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물갈이가 끝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리라는 칼을 맞댈 대련 상대가 늘어난다는 것에 만족했다. 세시를 위시한 솔리두스의 인사관리 직원들은 리라에게 아주 좋은 고기와 술을 잔뜩 선물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같은 숙소를 쓰는 사람들과 그를 나눠먹었다.
에셋은 그 과정에서 헬레니아 저택을 지키는 병사를 제안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늘도 호위인가요?”
“그렇습니다.”
에셋은 리라와 나란히 걸었다. 그는 실력이 느는 속도가 아주 빠르고 진중한 데다가 입이 무거웠다. 조금 더 경험을 쌓으면 솔리두스의 이름을 달고 산맥 너머로 파견될 예정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리라는 그것이 약간 부러웠다. 안정적인 수입- 떼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두 번째 월봉을 받았을 때였다-과 용병보다는 안전한 일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쪽에서 바다를 뒤로하고 뛰쳐나왔을 때 모험을 생각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리라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종종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들어 인사해왔다. 우락부락한 근육의 소유자들은 조금 이따 대련을 해보자는 제안을 건넸다. 에셋이 대신 호위 임무가 있다고 설명하면 그들은 아쉬워하면서 물러났다.
해가 건물 위로 떠오를 때쯤 리라는 자신의 고용주를 발견했다. 건물의 공동에 수행인들을 끌고 있었고,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라는 그가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계절을 넘게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의 사소한 버릇을 알게 된 탓이었다. 발렌틴은 책상을 두드리는 것처런 손끝을 움찔했다. 리라는 음영이 드리운 발렌틴의 입모양을 읽었다. 오늘은 분점으로 시찰을 가는 모양이었다.
리라는 눈을 조금 찡그렸다. 백금발이 아침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이슬에 빛이 반사되는 것 같은 색이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발렌틴. 리라는 그 이름을 되새김질했다.
헬레니아. 굳은살이 박힌 손이 움찔하는 것처럼 쥐어졌다.
리라가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숙소를 배정받은 그 날의 일이었다. 그녀를 감시하고 싶은 발렌틴의 의도를 짐작한 데브라가 안내한 곳은 사용인들의 숙소였다. 솔리두스의 본점은 헬레니아와 멀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이 헬레니아의 것임을 암묵적으로는 모두가 알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발렌틴 헬레니아. 아무리 정세에 무지해도 그 이름을 모를 수는 없다.
헬레니아. 황금의 땅. 동쪽의 거상. 향신료와 금과 비단으로 두른 저택을 세우고, 세상의 상권을 전부 지배하고자 하는 자들. 오만의 표상이나 그만한 능력이 됨을 모르는 자들이 없다.
지배자들의 경계를 한 몸에 받는 금맥의 주인.
“아, 도련님이네요.”
에셋은 발렌틴이 들으면 감봉을 1년쯤 할 호칭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그는 진중하지만 제 주인에게는 꽤 장난스럽게 굴었다. 에셋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항상 그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는 데브라도, 고대의 기록만 나타났다 하면 상단을 탈주하는 오딧세이도, 꽃집을 운영하며 사람을 관리하는 세시도. 그녀가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발렌틴에게는 그런 식으로 굴었다. 헬레니아가 마냥 아름답기만 한 땅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수하된 입장에서는 발렌틴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탭댄스라도 추고 싶을 것이다. 유능한 영주의 유능한 후계자. 자식 농사에 실패한 지배자가 얼마나 많던가?
“피곤해 보이시네. 혹시 이유를 알아요?”
에셋이 눈 아래를 쭉 늘려보이며 물었다.
“운동부족입니다.”
사고를 두 단계쯤 건너뛴 대답이었다. 일주일쯤 철야를 한다면 그 누구라도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되겠지만 건강하다 못해 강철 같은 기사가 그런 것을 이해 할 리 없었다.
“아침점심저녁 두그릇씩 챙겨 먹고 매일 1시간씩 뛰기를 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도련님 힘내셔야겠네요.”
“상단주는 좀 더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도 힘내셔야겠네요.”
에셋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는 태연함에는 맞장구를 쳤다. 친절한 청년이었다.
피곤한 낯으로 사용인과 실랑이를 하던 발렌틴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관찰하는 것처럼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바로 외근을 나갈 모양이었다. 시간이 제법 이른데, 하며 밖을 곁눈질하기는 했으나 리라는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았다. 불만을 말하기보다는 행하는 사람. 의견을 건의하는데 망설임이 없으나 다소 무리해 보이는 일도 수행하는 호위.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평가였다.
두 배 먹으면 두 배 근육이 붙을 거라는 이상한 소리를 한 후 리라는 2층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가벼운 소리가 들리는 안정적인 착지가 이뤄졌다.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주변에서 혀를 내둘렀으나 그녀에게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단주.”
꼬박꼬박 부르는 호칭에 그는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다. 이렇게 깍듯하게 굴면서 용병이라는 말로 우기고 들어오다니. 골칫덩이를 만났다고 생각했던 과거는 일찌감치 지워버린 지 오래다. 발렌틴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딱딱한 얼굴 둘이 마주하니 분위기가 제법 삭막해졌다.
“상단주 경계를 저렇게 유지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데브라가 어느 틈엔가 에셋 옆으로 쑥 나타나서는 입을 열었다. 에셋은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깔끔한 차림이었는데, 물기 하나 없었고 단정했으며 모자를 쓰고 있었다. 헐렁해 보이는데 참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에셋이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데브라에게 동조했다.
리라는 엉뚱한 면과 더불어 사람을 살뜰하게 챙기는 면이 있어 조금만 친분이 생겨도 사람들과 융화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일견 난감하기까지 한 호위 채용과정에서도 잡음이 적었던 이유였다. 물론 물갈이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데 발렌틴은 계속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니 그 밑의 사람들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금씩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발렌틴이 그렇게 경계를 유지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정체를 모르는 칼잡이를 옆에 두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 아무리 선량하고 악의가 없다고 해도. 상인은 모든 것을 의심할 줄 알아야 했다.
“데브라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 결정하겠지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데브라는 에셋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그보다는 한탕에 흥미 있습니까? 내가 제법 괜찮은 판을 아는데…….”
“도련님이 데브라님이 제안하는 한탕은 다 무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그럼 이만.”
쌩하니 도망가는 에셋을 두고 데브라는 모자를 다시 썼다. 그러고 난간에서 턱을 괴었다. 리라와 발렌틴이 공동을 빠져나갔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이번 일은 시찰이라 데브라가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손님이 하나 더 있기도 했다. 너무 늦긴 했다지만. 무엇보다 발렌틴은 상재다. 경험이 적고 미숙하다고 해서 그가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감인데.
리라는 발렌틴과 아주 잘 맞았다.
§
마차 한가득 향유를 싣고 온 상인, 루둘은 솔리두스의 상인과 그 호위를 번갈아 보았다. 상인은 상당히 앳되었고, 호위는 그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상인이란 모름지기 첫인상에 얕보이지 않아야 하는 법이었다. 나이 들어 보이게 화장을 하는 이도 있고 몸집을 크게 보이려 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반대로 유약한 인상으로 상대를 구워삶으려는 이도 있다. 그런데 솔리두스의 상인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백금발의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남자는 자신을 발이라고 소개했으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가명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루둘은 구슬발이 내려진 문 쪽을 힐끗 쳐다봤다. 찰나였으나 그를 눈치 챈 것처럼 호위가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시야가 차단되었다.
“험한 길을 오셨습니다.”
“알아주시니 매번 오는 보람이 있지요.”
상인과 호위는 상극처럼 보였다. 상인은 융통성이 있고 필요에 따른 기회주의자처럼 보였다. 호위는 딱딱하고 무덤덤한 얼굴이었고 편안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원칙주의자처럼 보였다. 합이 맞지 않을 것 같았지만 루둘은 호위가 어떤 성향을 가지는지 알았다.
‘솔리두스에 언제 저런 칼잡이가 들어왔지?’
루둘은 무릎을 치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산맥 너머에 있는 그의 고향으로부터 헬레니아까지는 편도로만 한 달이 걸린다. 당연하지만 무역을 준비하는 데도 몇 달이 걸린다. 합해 여섯 달 가량. 그 전까지만 해도 헬레니아에서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 보랏빛 눈. 대대로 귀하게 여겨져 왔던 보라색. 헬레니아에서 보기 드문 색 조합인데 저렇게 강하다면 눈에 띄었을 텐데. 상인들에게 강력한 용병이란 항상 탐나는 인재라 그는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호위는 그녀가 칼을 뽑는 순간 널부러질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행동거지에 예법이 배어 있었다. 누군가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솔리두스의 호위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냉막한 인상의 상인이 질문해오자 루둘은 생각을 미뤄놓고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수적들을 소탕하는 것이 누구겠습니까?”
물론 길을 잘 정비한 헬레니아의 덕분이다. 루둘은 헬레니아와 솔리두스 양쪽에 금칠을 한 후 거래장부를 내밀었다. 질 좋은 종이였다. 발은, 발렌틴은 골치 아프게 군다고 생각했다. 보란 듯이 내미는 장부에서 속내를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종이는 고급품이다. 공정이 까다롭고 질을 고르게 하기 쉽지 않다. 장인의 세습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그중에서도 왕가나 지배자들에게 납품하는 공방은 관리 하에 있다.
그런데 동부에서도 헬레니아에 납품하는 종이를 가져오다니. 중개 수수료 정도로 만족하려 했더니 제법 건방지다. 감히 누구 앞에서 재력과 인맥을 과시하는가?
금과 상아와 비단을 두르면 그것들의 주인이 되던가?
그는 향유 사업을 헬레니아에서 시작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금세 그만두었다. 모든 것을 이 안에서 생산할 필요는 없다.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은 자가생산 능력이 있어야겠지만 사치품은 그 사이에서 중개 수수료를 받는 것이 더 나았다. 중개무역을 맡고있는 지역의 수괴로서 내린 결론이었다. 모든 지역의 상인들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 둘 이유는 없겠지만.
루둘과는 향유를 몇 년 동안 독점거래 해왔지만, 그래. 독과점은 좋지 않은 법이다.
“그나저나 일전에는 뵙지 못하던 분인데, 누구신가요? 아주 능력이 좋아 보이는 호위로군요.”
결국 이 말이 나오는군. 발렌틴은 턱을 쓸었다. 최근 만나는 상인마다 무례를 감수하고서라도 질문을 하고 있었다. 옆에 감시해야 해서 두고 있는 것이었지만 발렌틴은 종종 리라를 파견 보낼까 고민하기도 했다. 상인들은 눈썰미가 좋다.
“리라라고 합니다. 상단에서 호위로 고용했습니다. 말한 바와 같이 실력이 좋아서.”
“오. 아쉽군요. 솔리두스에서 고용하지 않은 상태라면 제가 가장 먼저 계약하자고 했을 겁니다.”
“…….”
말이 길었다. 그가 상단주로서 왔다면 여기서 말을 잘랐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발렌틴은 장부를 마저 확인했다. 리라가 발렌틴을 힐끔 살폈다. 그가 불쾌해하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리라는 기척을 마저 확인했다. 거래나 복잡한 계산은 그녀의 일이 아니다. 리라의 일은 호위이며 발렌틴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었다. 리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일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허투루 할 마음이 없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성실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지만.
“호위의 실력을 한 번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내…… 솔리두스의 호위는 광대가 아닙니다.”
날카로운 말에 루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게 설득했다.
“설마 그럴리가요. 아무래도 칼잡이면 실력을 한 번 대보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제 호위들에게 개안할 기회를 달라 청하는 것이지요.”
리라가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고, 발렌틴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등을 세웠다. 리라는 늘 그랬다. 쳐들어올 땐 제멋대로 굴었지만 일에 관해서는 항상 허락을 구한다. 명령을 기다려서 이행한다. 성실하고 충실하다. 마치 충성하는 대상이 있었던 것처럼.
〈제 호위에 대해 짐작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들아, 정보를 취합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능력이란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순간 떠올랐지만 발렌틴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루둘의 뒤에는 우락부락한 호위가 둘 서 있었다.
“빨리 끝내.”
그 말이 끝나자 리라는 정중하게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몸을 곧추세우는 즉시 쏜살같이 뛰어나간다. 검은색 광선이 그어진 것 같았다. 칼과 칼이 부딪혔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리가 진동하듯이 울렸다.
일검에 칼이 깨지고, 이검에 한 명이 벽에 틀어박히고 삼검에 한 명은 뒤통수를 맞아 숨도 쉬지 못하고 기절했다. 루둘의 넙데데한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달려왔다. 바짝 마른 시종은 자료를 챙기고, 호위의 상태를 살폈다. 죽지는 않았다. 한동안 요양할 필요는 있겠지만 말이다.
리라는 이미 칼을 다시 찼다. 호흡은 가쁘지조차 않았다. 루둘이 데리고 있던 호위가 강한 편은 아니었다지만, 실력의 격차가 심했다.
루둘이 좋은 거래였다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는 손수 발을 걷었다. 차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귀환할 때 함께하게 된다면 저희 양쪽의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뼈 있는 말을 남기고 떠나가는 루둘을 보며 발렌틴이 테이블을 툭툭 쳤다.
“인기가 많군.”
“? 그렇습니까?”
리라는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벽에 박혀 있었다. 잔금이 자잘하게 가 미장한 벽이 죄다 떨어져나가 있었다. 리라도 자신의 월봉에서 이전의 수리비가 다달이 까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것까지 감산될 지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저건 루둘이 지불 할 거야. 부족하게 돈을 받는 것은 아닐 텐데?”
“고기가 부족해집니다. 상단주처럼 ……해지는 건 사양입니다.”
“…….”
허약이라는 말을 간신히 삼킨다. 발렌틴은 리라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따가운 시선이었지만 리라는 뻔뻔하게 굴었다. 사실이 아니던가? 발렌틴은 그녀에 비해 허약했다. 하지만 고용주 앞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을의 삶이다. 리라는 곧 밖을 둘러보겠다며 빠져나갔다.
돈을 저축해서 어디에 쓸 작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리라는 은행에 받은 돈의 상당수를 저금하고 있었다-이 사실을 발렌틴은 아주 새삼스럽지 않게 알고 있었다-.
‘돈을 부족하게 주는 것은 아닐 텐데.’
발렌틴은 리라의 실력을 잘 알았다. 밤이면 창문을 넘어오는 암살자를 처리한 적도 있었고, 발렌틴에게 시비를 걸던 여행객 한방에 때려눕힌 적도 있었다. 여차하면 무력으로 처리하려드는 치들 앞에 세워두면 협상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말이다. 그것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잘 알았다. 몇 번이고 스카웃 제의가 오고 있지만 리라가 거절하고 있어 호위 변경이 없는 것뿐이다. 계약이 우선. 발렌틴은 그 말을 떠올렸다.
그가 계약에 불합리한 조항을 넣었다고 해서 값을 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금을 저울에 달았을 때 상대의 혼을 빼놓을지 언정 저울의 눈금을 속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금을 다루는 자의 철칙이었다.
짧은 한숨이 이어졌다.
솔리두스의 상단주는 창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테이블을 툭툭 쳤다. 동쪽의 겨울 바람이 옷자락 사이를 파고들었으나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순한 버릇처럼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던 손짓은 곧 규칙을 가지고 리듬을 바꿨다. 마치 신호 같았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리라는 진짜 강하군요.”
동그란 안경을 쓴 거구의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창문 밖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키가 헬레니아의 평균 키보다 한 뼘 이상 커서 시선이 창문 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구부리고 넙죽 인사했다.
“상단주를 뵙습니다.”
허례는 됐다는 손짓에 그는 창문을 넘었다. 마치 제 집인 마냥 당연하게 넘어왔지만 발렌틴은 제지하지 않았다. 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는 장난기가 눈가에 매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애처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오딧세이였다.
“몇 개월이나 걸릴 줄은 몰랐는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온 겁니다. 게다가 리라는 감이 좋아요. 이 주변에 있는 것도 간신히 피해 왔다고요.”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잘 만든 자료를 발렌틴에게 내밀었다. 고생을 제법 했는지 옷 끝이 헤져 있었다. 발렌틴은 이 정도로 넘어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수고했어. 그렇게 말하며 자료를 넘기려는 찰나였다.
“바다까지 다녀왔습니다.”
“바다?”
표지를 막 넘긴 손이 멈춘다.
“서쪽의 영지 말입니다. 바다용을 물리친 기사!”
오딧세이는 그렇게 말하며 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는 갑작스레 흥분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흥분한 것이 맞을 것이다. 서쪽의 바다는 험난하다. 태초부터 바다괴물이 득실거리고, 해로를 개척할 수 없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도전했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고 포기된 땅에. 바다괴물들을 지배하는 괴물을 죽인 인간이 깃발을 꽂는다……. 그것은 영웅의 서사시였다.
발렌틴은 그가 더 흥분하기 전에 냉정한 목소리로 찬물을 부었다.
“〈애셜이 없었다면 서부의 왕을 자처하는 것은 라이즈벨이 될 것이다〉라고 불리우는 영지를 말하는 겁니까?”
푸시시. 오딧세이의 머리에서 김이 푹 식었다.
“상단주는 로망이 없으십니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본론.”
오딧세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리라는 술도 같이 마셔줍니다. 우리 상단주는 재미가 없으십니다. 그는 그렇게 투덜거렸고, 서사시와 반 걸음 더 멀어졌다.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는 발렌틴이 자료를 읽는 속도에 맞춰 자료에 대한 상세 설명을 곁들였다.
“먼저 헬레니아에 도착한 경로를 거꾸로 따라갔습니다만, 솔직히 저도 바다에 도착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지간히 잔뼈가 굵은 용병들은 절대 하지 않는 짓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신출내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여기 오기 전에 북부와 남부를 한 계절 안에 전부 거쳐 왔으니까요.”
“이카르드와 루엔야크를?”
“예. 초입까지만 들어갔지만 분명합니다. 용병들이 인상적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더군요. 칼바람에 베이고 모래바람에 긁히면서 허름한 차림새로 도착했는데 어마무시하게 강했다고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몸짓에는 약간 질렸다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북부와 남부를 전부 거치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한 계절 안에? 그게 가당키나 한가? 물론 용병들은 그것이 가능해도 하지 않는다. 그네들은 몸이 재산인 만큼 무리한 일정에는 어지간하면 동조하지 않는다. 상인들은 상품의 가치 때문에 일정이 급한 것이 아니면 이행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위의 명령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아랫사람이나 할 만한 짓이다.
“북부와 남부를 거쳐 가니 서부에서 떠난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말씀 주신 대로 예법을 중시하는 귀족 집안을 우선적으로 훑었는데, 루엔야크와 이카르드는 전부 소거했습니다.”
애셜은 제외되고, 자연스럽게 대영지 라이즈벨을 위시한 서쪽의 군소영지가 남는다. 그 중에서 자제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귀족가는 수가 많지 않다. 남성만 있거나 전투인원이 없는 가문도 제외. 하나하나 소거하다보면 남는 것은 단 하나다.
자료에는 어떤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왕가로부터 하사받은 레이피어를 들고 기사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모습. 바다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도 파도가 치는 듯하다. 그의 충실한 부하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몸을 숙여 속삭였다.
“서쪽에 후계자위가 비어있다고 합니다. 방계에 넘긴 것은 아니고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린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서쪽의 영주 브래이든 라이즈벨님의 머리색은 검은색이겠군.”
“예.”
발렌틴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평민의 것이 아닌 예법, 절도있는 걸음걸이, 칼을 드는 자세, 상대에게 보이는 성실한 예의.
왕가의 기사.
리라 라이즈벨.
“……”
수상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발렌틴은 입가를 가렸다. 정보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서쪽에서 동쪽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풍랑이 느껴지는 그 기세는 그의 감대로였다.
고민에 빠져 있던 발렌틴은 다리 쪽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시선을 내렸다. 오딧세이가 발렌틴의 바지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뭐합니까.”
“상단주. 이제 제발 봐주세요. 검수 다 끝나셨잖아요.”
그는 숫제 울 기세였는데 덩치가 크고 울먹이는 표정이 어울리지 않아 보기에 과히 좋지 않았다. 한숨을 쉰 발렌틴이 가방에서 오래되고 낡은 책을 꺼냈다.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책은 아니었지만 오래되어 발렌틴의 손길도 험하지는 않았다. 오딧세이가 발렌틴의 다리를 놓고-꽤나 매정하게- 책을 받아들었다. 마치 해를 향해 아기사자를 들어올리는 모습처럼 책을 들어 올렸지만 햇빛에 닿아 상할 것을 고려한 탓에 방향은 창문이 없는 벽이었다.
“〈지하도시 엘칼름 연대기〉. 초판본은 소실되고 복사본만 다섯부 남아서 떠돈다는 전설의 서사시가 드디어 내 손에……! 내 2년치 월급은 이것으로 역할을 다했어!”
할부를 길게하면 삶이 쪼들리는 법이지. 이것으로 오딧세이의 2년치 근무일을 확보한 발렌틴이 무표정하게 팔짱을 꼈다.
솔리두스에 무슨 마가 꼈는가? 발렌틴은 고민했다. 데브라가 알았다면 어휴, 마라니 애정입니다. 라고 으스댔을 생각이었다.
“오딧세이? 오랜만입니다.”
“리라!”
리라가 오딧세이가 했듯이 창문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쩐지 누가 지나가는 것 같더라니 당신이었습니까? 알고 있었어? 솔리두스의 밀정인 것 같아서 그냥 보냈습니다. 오딧세이가 감탄하는 사이 리라가 창문을 넘었다. 창문을 제 2의 문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기척도 없다. 작정하고 그녀가 기척을 숨긴다면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오딧세이는 기쁨에 취해있었으므로 찾아낼 방법은 요원하다.
짧은 시간만 얼굴을 맞댔는데도 둘은 죽이 제법 잘 맞았다.
“오늘 시간 돼? 나한테 끝내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호위는 이번 건으로 끝입니다.”
“아주 좋아! 술 한 잔 하겠어?”
“예.”
가방 안에 책을 곱게 싸서 넣은 오딧세이는 방금 전의 섬세함은 온데간데없이 팔을 넓게 벌렸다. 큰 손이 리라의 손을 맞잡았다.
발렌틴은 리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옅은 회색빛 눈이 의중을 탐색하는 것처럼 리라를 훑었다. 그녀는 기쁨에 겅중거리는 거구의 남자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으므로 그 의미를 몰랐다.
제 뒷조사를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화를 낼 것인가 실망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은 조종하는 방법은 차고 넘친다. 인질을 잡든, 자금줄을 틀어쥐든, 목적을 방해하든 간에.
서쪽은 멀고, 동쪽은 그의 땅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서쪽에서 알기 전에 마무리된다.
서쪽의 파도는 닿지 않고 동쪽의 향락은 그보다 시끄럽고 사치스럽다.
올곧은 기사가 칼을 들기에는 어지럽다. 기꺼운 일이군.
동쪽 땅의 다음 지배자는 상재였다. 그의 손에 들린 패는 그가 행하기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것이다.
“리라.”
“예.”
“1헤다르 밖으로 나갔으니 이번 월급 삭감이다.”
“예?”
리라가 충격받은 얼굴로 멈춰 선 사이 힘을 이기지 못한 오딧세이가 나동그라졌다. 아주 난장판이었다.
자, 이제 이 패를 어떻게 쓸까?
겨울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