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금향에서 서쪽의 창해까지

w. 레멘

03. 장막이 내려앉은 밤

칼은 고대부터 항시 양면의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악의를 가지고 칼끝을 내밀면 자타의 여부와 관계없이 무기가 된다. 선의를 가지고 칼을 접으면 유무의 여부와 관계 없이 존중이된다. 혹은 삶에 유용한 도구가 되거나.

그렇다면 리라 라이즈벨에게 칼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을 지키는 무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 그도 아니라면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 리라는 아마 첫 번째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기사였으며 영지민을 지키고 왕의 의지를 관철하는 칼이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가장 칼에 가까운 사람. 그 누구보다 종으로서 충실한 라이즈벨의 지배자. 서쪽에서 괴물에게 맞서는 바다의 위대한 전사.

브래이든 라이즈벨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원하는 결과를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용한 도구.

그리고 그 가르침은 그의 딸에게 그대로 내려왔다.

어둔 밤이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 껴 있었고, 불을 켜지 않으면 길을 식별하기 힘들었다. 동쪽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

리라 라이즈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조금 더 밝은 부분이 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헬레니아의 저택에는 불이 없었다. 벌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저택에는 고요가 늦게찾아왔으며 새벽은 그에 반비례하듯이 이르게 찾아왔다. 동이 트기도 전에 찾아와 단잠을죄다 날려버리는 부지런함이 켜켜이 쌓인 오래된 저택이었으므로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리라 역시 그 기이함을 감지했다. 허공에 늘어져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죽 장갑 아래의 손이 꾸드득 소리를 내며 단단히 쥐어진다. 그러나 얼굴에는 놀라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한참 보이지도 않는 달을 노려보던 리라는 발걸음을 옮겼다.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땅에서 태어난 기사는 절그럭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녀는 거침없이 걸었다. 당장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헬레니아에는 가까운 사막으로부터 인 모래폭풍이 불어닥쳤다. 헬레니아가 종종 겪는 풍파였다. 그 영향으로 헬레니아의 영지에는 모래가 회전초처럼 굴러다녔다. 꽁꽁 싸맨 옷 안으로 알갱이가 스며들어 피부를 긁었고, 술이 든 통 바닥에는 재수 없게 침투한 모래가 가라앉았다. 책을 보관하는 서고와 도서관은 죄다 발을 치고 천을 덮었으 며, 공방은 모든 재료를 창고 안에 보관한 채 문을 닫고 폭풍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폭풍이 끝나는 즉시 모두가 복구에 동원되었다. 솔리두스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바닥에 드러누운 의자를 세우고, 깨진 유리를 날랐고 그 사이를 틈탄 좀도둑들을 잡아냈다. 하얗게 뒤덮인 모래를 차양에서 털어내고 바닥을 쓸어내어 대충 사는 꼴을 갖춘 것이 대략 3일 전의 일이었다. 잠자는 시간, 훈련하는 시간마저 줄이고 나서야 정상화된 것이다. 모두가 피로 속에 지쳐 있었지만 그들은 사막 너머에서 온 아름다운 등을 밝히고 황금빛 술을 따르며 노래를 불렀다.

리라는 속으로는 조금 기꺼워했다. 재난과 피해를 기꺼워한 것은 아니었다. 리라가 태어난 땅도 주기적으로 바다괴물을 퇴치하고 영지를 고치고 피해를 복구한다. 모두가 자기 일처럼 나서서 먼저 손 내밀었고 그에 익숙했다. 그리고 모든 수습이 끝나면 녹초가 된 상태로 작은 축제를 벌인다.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와 남은 이들에 대한 위로가 동시에 자리하고 있었다. 리라 역시도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 칼을 벽에 기대두고 피에 젖은 겉옷을 치워둔 채로.

걸음에 소리는 없었으나 난폭한 기세는 있었다. 이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리라는 기실 그렇게 자주 웃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체로 표정이 없거나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빈말로도 부드럽고 상냥한 낯을 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단단히 굳은 모습으로 복도를 누비는 것은 제법 위협적이었다. 리라는 공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서쪽은 야만이라고 이를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법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항상 목숨의 위협을 앞에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법과 절차는 때로는 고상한 책상놀음으로 여겨지기 마련이었으므로.

잊지 못할 고향의 풍경을 떠올리는 시야에 곧 익숙한 문이 잡혔다. 오래되고 귀한 나무로 만든 문은 간소한 문양으로 음각되어 있었다. 그는 실용적임을 중시했으나 과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는 상재였다. 그의 가문 모두가 그랬듯이. 고작해야 문이지만 위압감이 느껴졌고, 그 앞에서는 절로 제 매무새를 다듬게 되었다. 문 밑에서는 빛이 새어나왔다. 잠겨 있지 않았고, 따뜻한 훈기가 배어나왔다.

리라는 방 안에 있을 사람을 그렸다. 오래된 사용감이 남은 책상, 작은 등이 켜져 있는 벽. 헬레니아가 한 번에 내려다보이는 창문. 긴 옷가지는 옷장에 걸려 있을 테고, 많은 책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는 반듯하게 책을 보관하지 않아서 오딧세이가 보고 비명을 지르고는 했다. 생각은 물이 강을 따라 흐르듯 흘렀다.

[창문은 창문이고, 문은 문이다. 나를 찾아올 때는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리라는 저도 모르게 문을 두드렸다. 암살자로서는 최악이었고, 칼을 품은 사람으로서도 좋은 귀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리라 라이즈벨인 것을.

문은 열려 있었다.

발렌틴 헬레니아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의 부하가 추천한 책으로 제목은 <루엔야크의 표운과 속하로부터의 기명>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이었으며 내용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루엔야크의 풍경에 대해 서술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방계로 흩어진 일가의 호명을 이야기한다. 작가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몇 백 년 전에나 쓰이던 방언들이 곳곳에 함정처럼 자리하고 있는 바람에 발렌틴은 이것이 암호문으로 쓰여진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시간 죽이기에 좋다고 말하던 오딧세이가 동의할 수 없는 의심이었다.썰물처럼 흩어지는 집중에 미간을 짚고 있을 때였다. 발렌틴은 노크 소리를 들었다. 무겁고 문이 흔들리는 것처럼 강한 두드림이었다. 그는 올 것이 왔나 싶었다. 놀라지 않았고,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방문자에게 그나마 성장했군 이라고 생각했다.

“들어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방문자를 맞이한다. 그에 대해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머리로 하는 일에 익숙하고 능한 것이지 몸을 쓰는 일에는 능하지 못하다. 그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유능한 칼잡이와 어떤 환경에서도 스며들 수 있는 고서수집가와 뛰어난 육감으로 위험을 피해가는 도박사가 있다. 그 외에도 그의 주변에는 많은 패가 있었다. 그를 때에 맞춰 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일견 타박처럼 느껴졌다. 저택의 밤이 늦는다 한들 시간이 늦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리라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발렌틴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있는 등이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자기 전에 채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라는 고대의 주문처럼 쓰여진 책에서 시선을 돌렸다. 잘 만들어졌고, 잘 손질된 칼을 뽑아든다. 주홍빛이 칼날에 반사되었다. 한 걸음이라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리라는 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이 툭 바닥에 떨어져 펼쳐졌다. 침대가 출렁거렸다. 팔이 단단하게 그의 옆을 짚었다.

얼굴 위로 엷은 빛이 윤곽을 그렸다. 칼이 목 위에 세워졌다. 날은 닿지 않았으나 예기는 분명했다. 유리도 아니고, 실제로 냉기를 뿜어내지도 않음에도.

어둠 속에서 자수정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깊은 굴속에서 처음으로 보석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 진가를 알고 있었을까? 한 번도 가공되지 않은 투박한 원석에서도. 그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을 찾아내는 것처럼. 발렌틴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익숙한 말투였다. 그는 평소처럼 인상을 찡그렸고,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이냐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부하들에게 하는 것과 동일했다. 그러니까,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굳은 결심과 함께 칼을 들었던 리라는 움찔했다.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그 동요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동요를 안들 리라의 말이 달라질 리도 없었다.

“칼잡이가 칼을 들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칼잡이가 말해보는 게 어때.”

안정적이었다. 마치 그녀가 절대 그를 해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리라는 숨을 훅 들이켰다. 가시를 세우는 것처럼 호흡이 날카로워진다. 에셋이 이 방에 있었다면 그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리라와 맞댔을 것이다. 자신이 패배하고 당장 목숨 잃는다고 해도 말이다. 무기 하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에게 과한 기세였다.

리라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협박하는 겁니다, 발렌틴.”

가시처럼 솟은 호명이었다. 평소에는 푹 찌르면 들어갔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천으로 된 공처럼 굴더니 제법 매서웠다.

“무엇에 대해? 내가 섭섭하게 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발렌틴은 리라를 특별대우했다. 아무리 좋은 패였다고 해도, 아무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헬레니아의 이름을 단 후계자가 출신도 모르고, 주인 앞에서 격식을 차리지도 않는 부하를 용인하고 있었다. 계약서로 옭아매 바깥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타인에게 모욕 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명백한 개인을 배려하고 있었다.

“……제 뒤를 캐셨단 것을 압니다. 함구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뒷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칼의 면이 목을 눌렀다. 손끝이 떨릴 정도의 냉기가 목을 스며들었다. 인상을 잠시 찡그린다.

발렌틴은 리라 라이즈벨이 이런 식으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그가 직접 흘린 것이니까. 오딧세이가 보고한 내용은 그에게 가장 빠르게 전달되었을 뿐 다른 영지의 주인들이 모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각자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한 조사는 당연한 일이다. 그저 그가 조금 더 빨랐을 뿐이며,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오랫동안 비밀로 취급되기는 어렵다. 그럴 바에야 길을 닫아두고 이득을 얻는 것이 더 나았다. 어디로 튈지모르는 공이니까.

“비밀을 지키는 데는 비용이 들지. 솔리두스가 입막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금을 투자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

솔리두스가 벌어들이는 돈은 어디로 가는가? 헬레니아는 무엇을 위해 금을 축적하는가? 그들은 비밀과 귀한 물건을 쥐고, 그 판로를 통제한다. 그것들은 때로는 기밀로 취급된다.그리고 기밀이 기밀로 남기 위한 금액은 때로는 물건을 사고 파는 비용보다 높다. 옆에서 그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가?

“목숨보다 큰 비용이 있습니까?”

성장했군. 정말로. 발렌틴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헬레니아에 도착했을 때의 리라라면 이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을 터다. 그러니 목숨을 저울에 올리고 그것을 비유로 내뱉는 것 자체가 헬레니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뜻. 황금과 저울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

발렌틴은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네가 걸 수 있는 신뢰가 어디 있지?”

상인은 신뢰 없이 일하지 않는다. 부하와 군주 간은 물론이요, 부모와 자식 간, 심지어 돌보아야 할 영주와 영지민 사이에서조차.

“제 이름을 걸겠습니다.”

“네가 비밀로 남겨두길 원하는 이름에는 가치가 있지. 대륙의 사방에 그보다 귀한 이름은 많지 않으니까.”

발렌틴의 눈 위로 등불이 떠다녔다. 어둠 속을 밝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둠에 잠기지도 못하게 하는 빛이었다.

“그건 가치가 없어.”

매몰찬 발언이었다. 리라는 가슴께가 따끔한 기분을 느꼈다. 리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이름을 숨기는 것이 떳떳하지 못할 이유는 아닙니다. ‘리라’라는 이름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이 이름으로 사람을 지키고 신념을 관철했습니다. 이 이름에는 긍지가 있습니다.”

낮고 뭉툭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리라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어떤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이즈벨> 없이 ‘나’를 정립하는 시간이었다. 칼잡이, 기사, 정체를 밝히지 않는 호위.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해 타인을 보호하고, 타인으로부터 배우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리라는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당신이 본 저를 믿으십시오.”

아니, 그것은 사실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발렌틴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상행을 아는 총수가 그런 것에 공포를 느낄 리는 없었다. 캐러밴이 큰 건으로 인해 상행을 나서면, 그러고 나서 그 캐러밴이 모래폭풍에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상행을 나선 상인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상품 역시 전부사라진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단에 속한 모든 직원들과 가족들은 거리로 나앉고 빚이라도 있다면 전부 차압 된다. 칼잡이만 목숨을 걸겠는가? 그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삶에서 투쟁한다.

“알았으니 칼 치워.”

일어나는 것처럼 침대를 짚자 리라가 힘으로 찍어눌렀다. 어지간한 힘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정쩡한 자세로 발렌틴은 그녀를 계속 올려다봐야했다.

“제가 당신의 무엇을 믿을 수 있습니까?”
“칼 들고 못 믿겠다 말하는 것도 좀 우스운 걸 아나?”

이전부터 느꼈지만, 리라와의 대화는 종종 헛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성정이 우직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딘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이름이 뒤를 쫓아 그 이름을 증명하라고 짖기라도 하는 듯했다.

‘너무 간 생각이군.’
“네 뜻대로 해주지.”

믿든 믿지 않든.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필요하다면 정말로 목을 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걸려 있는 것이 많았고, 그를 행할 의무가 있었다. 굳이 목숨을 내놓을 이유는 없다.

리라는 마치 불신하는 것처럼 찌푸린 인상을 천천히 폈다. 칼에 날이 섰다. 따끔한 감각이 목에서 느껴졌다. 파도가 밀려나는 것처럼 리라가 물러났다. 포말과 모래를 긁는 바닷물 소리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마치 바다가 떠나는 것 같았다.

엷게 맺힌 핏방울이 침대 위에 뿌려졌다. 흰 침대보가 점점이 물들었다. 음영이 어지러이 드리워진 침대 위에서 리라가 내려섰다. 소리도 없이 칼이 칼집으로 들어간다. 단단히 쥐어진 손이 천천히 펴졌다. 폐에서 숨이 빠져나갔다. 누구의 숨이랄 것도 없었다.

단단히 묶인 머리카락이 포물선을 그릴 정도로 몸을 돌린 리라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제 목을 쓸어보고 있던 발렌틴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인간상이었다. 공포스럽거나 두렵거나 하지는 않지만……. 불가해가 호기심을 부른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인간.

“그럼 다시 동지입니다.”
“부하겠지.”

발렌틴은 그를 정정하며 손을 내밀었다. 힘 있는 악수가 이어졌다. 껄끄러움을 남긴 채, 라이즈벨과 헬레니아의 후계자는 합의를 마쳤다. 그것이 어떤 결과가 될 지도 모른 채로. 밤이 저물고 아침이 온다.

04. 금향金響

솔리두스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부의 물갈이를 끝내고, 해에 가장 큰 재난인 모래폭풍도 지나갔다. 무역로의 정비가 순조롭게 끝나 상행은 더 활발해졌다. 헬레니아의 사람들도 본 적이 드문 귀한 물건들이 성문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통화량은 연일 최대치를 갱신했다. 솔리두스는 몸을 불렸다. 새로운 사람들을 고용하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새로운 지부 설립에 차출되었다. 용병들은 매번 바뀌는 호위와 캐러밴에 짜증을 내보였지만, 지급되는 월봉을 보고 불만을 모조리 삼키고 냉큼 파견을 나갔다.

피로도와 금은 정비례했다. 세시는 이마를 책상에 댄 채 엎드려 있었다. 잠에 든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끔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좋은 꿈을 꾸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녀 옆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대체로 그녀와 비슷한 상태지만, 세시보다 좀 더 혼절에 가깝다는 것만 차이가 있었다.

유리아는 소파 위에 상당히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기절해 있었다. 안경은 비뚤어져 있었고 손끝에서 흘러내린 서류들이 바닥을 어지럽게 했다. 에셀로스는 머리만 책상에 박은 채 팔을 바닥으로 늘어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머리 위에 잉크병이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백 퍼센트 그의 머리를 적실 것이다. 머리를 빡빡 밀어둬서 다행이었다.

밖에는 새가 울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지 않는 새였다. 세시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 밑에 내려앉은 다크서클은 하루 이틀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엉망진창인 머리를 대충이라도 빗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좋지 않은 자세로 잠에 든 탓에 허리고 어깨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며칠이나 집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솔리두스는 아픈 여동생을 위해 출퇴근 시간을 배려해주었지만, 지금은 해당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자기관리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깔끔한 사람이었지만 도무지 이 피로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세시가 그 상태로 까무룩 잠에 들기 직전,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느냐는 질문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의 무례함이었다. 세시는 아주 예민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잉크병을 쥐었다. 하지만 곧 놓게 되었다. 던진다고 맞아줄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데브라.”

잠에 든 팀원들을 위해 소리치지 않는 것이 세시가 할 수 있는 최대였다.

“세시. 살아있어서 다행입니다. 유리아와 에셀로스는 죽은 것 같지만.”

육감이 뛰어난 솔리두스의 간부는 어지간한 공격은 감으로 피해버리는 괴짜였다. 그녀는 거의 다 죽어가는 솔리두스의 다른 직원들에 비해 굉장히 쌩쌩해보였다. 아주 얼굴이 빤들빤들했다. 그러고보니 외부에서 들어온 얼뜨기 상대로 크게 한탕 했다던가……. 문제만 없다면 뭐라고 할 일은 아니기는 했다. 고까워서 문제일 뿐이다.

데브라는 손에 서류를 들고 있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서류에는 기밀 표기로 아이리스가 새겨진 씰링이 찍혀 있었다.

“왜 그걸 퍼시가 아니라 당신이 가져오나요?”

눈가를 문지르는 세시를 향해 데브라가 히죽 웃어보였다. 그녀의 뒤에서 솟아나오는 것처럼 에셋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데브라만 보면 냉정한 얼굴로 멀어지더니 어떻게 죽이맞긴 한 모양이었다.

“퍼시가 조만간 쓰러질 것 같아서 쉬게 해드리고 가져왔습니다.”
“그 사람이 일을 남에게 맡길 사람이 아닌데……. 기절이라도 시킨 건가요?”
“저는 리라가 아닙니다, 세시님.”

그냥 쉬시라고 보내드렸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칼처럼 잘리는 말투였다. 말만으로도 무가 잘릴 것만 같았다. 대상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싶을 정도였지만 다행히도 리라는 자리에 없었으며, 있었다 하더라도 신경 쓸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기밀이라 그렇지 급한 건 아니니까 나중에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열었나요?”
“아니요, 여는 건 못 봤습니다.”
“아이참. 감입니다.”

검지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이 아주 얄미웠다. 세시는 데브라의 손가락을 꺾어버리는 상상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감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었다.

“그럼 대체 왜 온 건가요? 지금 인사이동 때문에 바빠서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없어요.”

소란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깨어나지를 못하는 부하직원들이 안쓰럽다. 물론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에셋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차라도 우릴 모양이었다. 데브라는 바닥을 딱딱 차는 소리를 내며 걸어와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눈을 찌르는 것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세시가 인상을 찡그렸다. 빛에 익숙해지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지금 밖에 좀 보시겠습니까?”

빙긋 웃는 낯에 세시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창문 너머는 저택 바깥으로, 치안이 좋지 않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저택의 경비병들이 경계는 해도 순찰은 돌지 않는 지역이었다. 어지간하면 저택의 고용인들도 그곳으로 출입하지 않을 정도였다.

익숙한 사람 둘이 서 있었다. 양쪽 다 머리가 까치집을 지었고, 두르고 있는 로브는 헤지고 먼지가 가득 꼈다. 그들은 뭔가를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있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한쪽이 팔이 꺾인 무뢰한을 바닥에 메친 상태라는 것일 터였다. 세시는 이마를 짚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많은 말을 삼키고, 최대한 문장을 정제했다.

“좀 곤란한 관계네요.”

한쪽은 라이즈벨의 후계자, 다른 한쪽은 헬레니아의 후계자. 대륙을 호령하는 동서남북의 영지에서 경쟁자조차 없는 후계들. 무력의 차이는 격심하고, 한쪽이 손을 쓰기로 마음 먹으면 그때는 막을 방도조차 없다. 물론 세시는 리라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불씨를 염려하는 것도 부하들의 몫이었다. 헬레니아의 영주가 리라를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경계를 완전히 놓아두지 않는 것처럼.

“너무 가까운 관계가 됐어요.”
“친구끼리 소꿉장난하는데 나쁠 게 있습니까?”
“…….”

데브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세시는 리라가 영주에게 불려갔던 날을 기억했다. 어지간하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었던 그들의 주인이 언성을 높인 날이었다. 제 몸 하나 아낄 줄 모르는 이가 어떻게 사람의 위에 서느냐는 호령과 동시에 위치도 모르고 상대의 몸을 해하는 무모함 역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단 호통이었다. 아끼는 만큼 공적을 확실하게. 발렌틴의 윗대부터 섬겨온 부하들로서는 그를 알고도 난감한 낯으로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라이즈벨은 애셜의 개니까요.”

잔이 책상 위에 하나씩 놓였다. 잘 말린 꽃잎과 이파리를 엮는 화차花茶가 유리다기 안에 떨어졌다. 달큰한 향기가 순식간에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 사이가 좋아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닥에 쓰러진 인영이 버르적거리자 리라가 뻥하고 발로 찼다. 벽에 들이박은 치가 그대로 기절했다. 둘은 여전히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겠지. 한 명은 그냥 죽이자는 입장일 테고, 한 명을 살려서 뒤를 캐자는 입장일 것이다. 아마 건전한 토론-상당히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는-을 거친 후 둘은 적당한 합의를 볼 것이다.

쪼르륵. 연한 초록빛의 찻물이 잔 위에 부어졌다. 잘 말린 빨래처럼 잠들어 있던 이들이 눈을 뜨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세시는 눈가를 꾹 눌렀다. 에셋이 내미는 잔을 받는다. 향이 좋고 아름다운 차는 아주 값비싼 것이었다. 발렌틴의 친구가 선물해준 것이기도 했다. ‘차는 저보다는 세시가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였다.

세시는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발렌틴과 리라가 건물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리라가 반갑다는 듯이 크게 팔을 흔들었다. 발렌틴이 한숨을 쉬었다. 리라가 다시 발밑을 뻥 찼다. 어느 틈에 기운을 차린 분리수거가 불가능한 쓰레기가 다시 굴러다녔다.

“재밌어 보이니까 그대로 둡시다.”

어차피 좀 있으면 정쟁이니 뭐니 머리 아플 텐데. 데브라는 저도 차를 달라며 에셋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잔이 부족하다는 말과 함께 다관을 내려놓았다. 데브라는 허망한 표정이 되었다. 주변에서 쌤통이라며 수군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네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

리라와 발렌틴은 무뢰한을 질질 끌며 자리를 떠났다. 칼부림이 한 번 났는데도 편안하게 넘어갈 만큼 마음이 넓지는 않았지만……. 함부로 상사의 관계를 재단하는 것은 부하로서의 덕목은 아니었다. 세시는 공연히 데브라의 정강이를 툭 찼다. 데브라는 아픈 척도 하지 않았다.

차 맛이 썼다.

§

헬레니아의 종속들이 쓸데없는 걱정을 내세울 정도로 발렌틴과 리라는 잘 지냈다. 둘은 심심치 않게 같은 사고를 쳤고, 그 탓에 헬레니아의 군주는 종종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 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일정은 제법 평화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른 아침, 리라는 눈을 번쩍 떴다. 빠르게 세안을 마치고 옷차림을 정돈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고는 항상 향하던 연무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발걸음 가볍다 못해 호쾌하기까지 했지만 요란하지는 않았다. 새벽처럼 일어난 저택은 벌써부터 구운 빵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사용인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헬레니아의 후계자는 부지런한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소란스러운 아침을 반긴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경쾌하게 발렌틴의 방 앞에 도착한 리라는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손을 든다. 똑똑똑. 정중하게 세 번, 문을 두들긴다. 안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침대 옆의 작은 협탁에서 뭔가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이어 들리더니 깊은 한숨이 뒤따랐다. 모든 것을 들으면서도 리라는 기다렸다. 발끝이 잘 닦인 돌바닥을 툭툭 두드리고, 볼에 붙인 거즈를 문지른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뒤 발렌틴이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카락 끝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약초 냄새가 조금 났고, 팔에는 붕대를 감아놓았다. 목에는 엷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리라의 시선이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발렌틴.”

발렌틴이 리라를 바라보다가 화답했다.

“이른 아침이겠지.”

기운도 좋아. 발렌틴은 그 말을 삼킨 것 같았다. 그는 상당히 피로해 보였지만 리라는 그와 반대로 아주 쌩쌩했다. 어제까지 둘의 일정이 강행군이었음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과를 어느 정도 얻었으니 며칠쯤 쉬어도 될 텐데 리라는 더욱 기운 차 보였다.정확하게는, 즐거운 것 같았다. 리라 자신도 그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운이 없었던 적이 거의 없었지만 요즈음은 더욱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발렌틴이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리라는 발렌틴이 마냥 누워서 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제 해치운 사안이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지.”

리라와 발렌틴은 모래폭풍으로 인한 소요가 진정되자마자 뒷골목에 숨어들었다. 헬레니아의 모든 것은 헬레니아의 것이지만 후계자는 완벽한 헬레니아가 아니다. 개인의 무력이 출중하지 못하며, 믿을 만한 수하의 무력도 신뢰할 수 없으니-데브라나 세시의 주먹을 믿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발렌틴 헬레니아는 헬레니아의 뒷골목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발렌틴은 그날 밤 이후 리라를 끌어들여 바로 뒤로 숨어들었다. 리라는 그 때 발렌틴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그의 뒤를 따랐다. 리라는 호기심을 가질지언정 발렌틴에게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에 칼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발렌틴은 주위를 한 번 돌아보더니 리라보다 조금 빠르게 걸어나갔다. 리라는 에셋이 저 멀리서 얼굴을 반만 내놓고 지켜보고 있다던가, 발렌틴이 금세 제게 추월당할 것이라던가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헬레니아의 저택에 오래 살았던 사람이나 솔리두스의 오랜 측근이나 알 법한 통로로 향했다. 특정 시간이 되면 왕래가 적어지는 길에는 청동으로 만든 저울을 든 조각상이 있었다. 아주 관리가 잘 된 대리석 복도에, 설계를 통해 특정 시간마다 사람이 사라지는 길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청동 저울의 한 편을 눌렀다. 무거운 돌벽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어떤 기술이 들어가 있는 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발렌틴은 리라의 앞에서 비밀통로를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리라는 그와 자신 사이에 신뢰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텅 빈 그릇 안에 신뢰라는 가루를 뿌려 채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주 반짝거리는 요정의 가루 같은 것이었다. 어둠밖에 없는 길을 걸으며 발렌틴이 중얼거렸다.

“불법으로 마물 사냥을 할 생각을 하다니 간도 크지.”

부츠가 부딪히는 소리로 거리를 재고 있던 리라는 공연히 제 턱을 긁적였다. 그녀는 동쪽의 생태가 종종 이해되지 않았다. 마물은 죽여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마구잡이로 죽이면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시장을 저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상행이 성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라이즈벨의 후계자로서 부족하다고 해도 이것을 모르는 라이즈벨은 없다.

마물의 번식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고, 때로 작은 소도시를 하루 만에 멸망시키기도 한다. 영주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만 잘해야 했다.

헬레니아는 마물의 위험성보다는 시장경제에 대한 영향을 훨씬 크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리라는 그것을 안일한 태도라고 생각했고, 일전에는 한심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발렌틴의 옆에서 리라는 많은 것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법 잡아내지 않았습니까?”
“그걸로는 부족해. 사막에 금고가 있는 것 같은데 가져와야지.”
“공적으로 회수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헬레니아인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얼뜨기들로 구성된 용병집단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실력이 제법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눈에 띄었다. 어제 리라는 그들의 절반 정도의 머리를 깨서 경비대에 넘기고 한둘 정도는 아주 예쁜 포장 선물처럼 둘둘 말아 발렌틴의 아지트에 보관했다. 그 사이에 마물을 팔아 얻은 수익은 헬레니아의 세금징수인들에게 압수되었다.

발렌틴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가벼이 묶은 머리카락 끄트머리에서 천으로 된 끈이 흔들렸다. 푸른빛의 공단은 아주 고급스러운 것이었고, 천에는 아이리스가 새겨져 있었다. 약간 해진 것이 아쉬웠다.

긴 복도 안에 감정이 없는 목소리가 웅하고 울렸다.

“월봉이 1년 정도 계속 깎인 상태여도 괜찮다면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가겠습니다.”

비장한 대답이었다. 갑작스레 눈이 번쩍거렸다. 발렌틴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부로 리라는 1년 치 월봉을 삭감당했다. 발렌틴이 약하다는 이유로 벽장에 처박아두고 제압을 시도한 결과였다. 오래된 옷더미처럼 구겨져 있던 발렌틴은 대략 2시간쯤 후에 리라에게 구조-병주고 약주고와 다름이 없었다-되었다. 지금 발렌틴의 몸에 난 상처는 실상 리라가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리라는 그의 눈치를 봤다. 물론 발렌틴이 약한 탓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발렌틴이 뒤를 돌아보았다. 제 발이 저린 리라가 몸을 긴장시켰다. 발렌틴은 단순히 길의 끄트머리에 도달해서 멈췄을 뿐이었지만.

발렌틴은 자리에 멈춰 서서 벽을 두드렸다. 왼쪽, 오른쪽으로 나뉘어진 세 갈래 길 앞에서 익숙한 리듬으로 벽을 두드리자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밀려났다. 햇빛이 그 안으로 쏟아졌다. 서쪽의 비밀통로는 담쟁이 넝쿨이 뒤덮고 있었지만, 동쪽은 그렇지 않았다. 오래되어 쓰지 않는 모래와 돌의 신전이 펼쳐졌다. 어둠을 떠나자 모래빛을 반사한 햇살이 눈을 아프게 했다. 창문을 닫아두지 않고 천으로 엉성하게 가린 탓이었다. 리라는 인상을 찡그리며 칼 위에 손을 얹었다.

걸음은 멈추지 않고, 경계는 완연했다.

리라는 익숙하게 발렌틴의 앞으로 나섰다. 부서진 석상과 엎어진 의자, 깨진 테이블 사이로 입이 막히고 눈 한쪽이 붓고 다리가 꽁꽁 묶인 채 옆으로 넘어진 얼뜨기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법 기개가 있군. 리라는 그렇게 생각했고, 아마 발렌틴도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자격만 갖춘다면 범법자도 전력으로 쓰는 것이 헬레니아니까.

“재갈을 풀어.”

어디 변명이라도 들어봐야겠군. 어떤 방식으로 헬레니아의 돈을 갈취하려고 했는지. 표정이 없던 얼굴에 호선이 그려졌다. 모든 상인들이 사납다 못해 두려움까지 느끼는 미소였다.속옷까지 탈탈 털어간다는 헬레니아의 징수인들이 어디서 그런 기조를 배웠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알 수 없는 오한에 리라가 몸을 떨며 남자의 재갈을 푸는 즉시 리라와 발렌틴은 새롭고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간절하게 외쳤다.

“화장실! 원하는 건 물에 뜬 병처럼 나불나불 불 테니까 빨리!”
“…….”
“…….”

그들이 새로 배운 것은, 생리현상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

남자는 화장실에 다녀온 후 아주 온후한 표정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리라마저 움찔할 정도의 박력으로 가득했던 걸 생각하면, 참으로 극적인 변화였다.

남자의 얼굴에 크게 상처가 나 있었고 얼굴 외에도 드러난 피부에 물집이 잡혔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새끼손가락은 발렌틴과 리라는 시선을 교환했다. 동상으로 인한 물집과 흉터, 절단 흔적이었다. 그렇게 보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헬레니아와 라이즈벨은 기온의 변화가 크지 않은 영지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루엔야크 출신일 터였다. 땅은 얼어붙어 농사를 짓기 어렵고, 만년설에 뒤덮인 땅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기간이 적다. 서부나 동부에 비해 훨씬 많은 마물의 습격을 이겨내면서, 사냥의 부산물을 팔아 먹고 산다. 이들은 대부분이 뛰어난 사냥꾼이지만 혹독한 환경 탓에 타지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했다. 그런 만큼 외부로 많이 나오지도 않았다.

가까운 동부에서는 종종 보이는 모양이지만.

“북부의 사냥꾼이 동부의 사냥꾼을 겸업하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동부에서 마물 사냥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가능했다. 남자는 움찔해서 시선을 피했다. 그의 인상은 험악했지만 눈이 둥글어서 만만해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가진 무력은 그런 인상과는 별개였겠지만.

발렌틴은 어제 내리 읽어내린 서류를 생각하며 미간을 주무르듯 눌렀다.

“금고의 위치를 말하면 목숨은 붙여주겠습니다, 사훈.”

사막을 일일이 이잡듯이 뒤지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부족하다. 리라는 힐끔 발렌틴은 내려다보았다. 백색빛이 나는 금발은 음영 속에서 빛을 다소 잃었다. 동부의 태양 아래가 참으로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리라는 발렌틴이 말하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칼 위에 손을 올린채로 잡다한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는 공처럼 생각이 튀어 나가고 있었다. 이 행위는 발렌틴의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렇다면 불법 아닌가? 그렇지만 여긴 동부인데. 그래서 고기라도 더 먹으면 좋긴 하지. 아주 탄성 넘치는 공이었다.

“침묵할 겁니까?”
“…….”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발렌틴에게서 가벼운 한숨소리가 들렸다.

“내게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어느 쪽을 쓸지 고르고 싶지는 않군요.”

리라도 이것이 국가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사훈이라 불린 남자는 입을 조가비처럼 다문 이유도 그 탓일 터였다. 손끝, 무기, 협상 대상자를 확인하는 태도는 그가 베테랑 사냥꾼임을 증명했다. 리라 앞에서는 쪽도 쓰지 못하고 바닥에 메쳐져야 했으니 사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황당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연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제 막 약관을 넘긴 것 같은 검사와 칼 몇 번 제대로 대보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만도 한데, 그런 모습도 아니다.

‘동료인가?’

나쁘지 않다. 대련하자고 해야지. 리라는 어느 틈에 동료가 된 미래까지 생각했다. 사훈은 시선을 살살 피하다가-덩치와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태도였다- 입을 열었다.

“목숨만 붙여주는 겁니까?”
“적어도 이 일로 어디선가 추궁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발렌틴은 제 식구를 잘 챙기고, 다루는 방법을 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것일 터였다.

“풀어줘.”

칼이 한 번 뽑혔다가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 리라는 칼을 다시 칼집에 밀어넣고 있었다. 사훈는 간신히 칼날이 제 줄을 자르고 가는 것을 보았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행동이 그 행위를 인지하게 더 어렵게 했다. 저렇게 칼을 잘 쓰는 자가 동부에 있었던가? 동부에는 기사가 나지 않을 텐데.

발렌틴이 턱을 괴었다.

“내 저울에는 목숨이 아니라 금이 있지만, 내 호위의 칼에는 신의가 있는 편이라.”

사훈은 발렌틴을 한 번 보고 그 다음에는 리라가 손이 얹힌 손잡이를 보았다. 두어 번 더 반복하던 시선이 리라의 손에 꽂혔다. 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다. 금에 대한 이해도가 다시 거꾸러지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발렌틴은 어디선가 계약서를 꺼내 그에게 사인을 하게 시켰고, 리라는 증인으로서 참여했다. 정보 제공을 대가로 목숨을 보장한다는 내용과 더불어 추가 계약에 관련한 내용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지만 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도 다 동료가 되기 위한 시련인 법이다.

솔리두스의 상단주는 루엔야크의 사냥꾼과 계약을 체결했다. 한쪽만 흐뭇한 거래였다.

동쪽의 사막에는 보물이 묻혀 있단 소문이 돈다. 캐러밴을 잡아먹는 마물들, 오아시스에 터를 두는 도적과 모래폭풍에 파묻힌 고대의 유적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의 토박이들은 그런 곳을 이용하지 않는다.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었다. 모래폭풍이 불면 지형이 바뀌고, 마물끼리 영역 다툼이라도 나면 세력분포가 엉망이 된다. 유적을 파내다가 유사流沙에 휩쓸려 죽기도 십상이다.

그러니 일확천금을 노리며 사막에 도전하는 자들이라고는 이방인이나 괴짜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동부인이라면 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 정도로 남겨둔 곳에, 이방인들이 금고를 숨겨둔 것이다.

“사실은 세금 징수하고 감사가 무서워서 숨겨둔 거지만.”
“그러고 그대로 길도 잃어서 돈도 잃고 말입니다.”

발렌틴의 말투는 무감했으나 가시가 있었다. 입안에 들어온 모래를 에퉤퉤하고 뱉어내고 있던 리라가 움찔했다. 딱히 공격적인 언사는 아니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여겨져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리라에게는 죄가 없지만 그의 부하들이 종종 저런 식으로 한 소리를 듣는 것은 일상이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도 잃을 수 있겠군요.”

그들은 지형이 완전히 뒤바뀐 땅 위에 있었다. 회색빛 눈과 보랏빛 눈이 한 점을 바라본다. 그들은 바위와 모래가 모든 지평선을 채우는 사막 한가운데에 있었다. 짐은 어딘가의 사라져버리고, 지도는 무용지물이 된 채로. 모래는 휘날리지 않고, 하늘은 맑았다. 그러나 마냥 좋은 날씨라 칭송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마물이 그들 앞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리라는 칼을 고쳐잡으며 상황을 복기했다.

리라와 발렌틴은 비자금을 위해 사막의 금고를 탈취하기로 작정했다. 당연하지만 며칠 정도를 버틸 물자가 있어야 했고, 길잡이도 있어야 했으며, 짐꾼도 있어야 했는데 발렌틴은 아주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길잡이는 붙잡아온 범죄자로 갈음하고, 짐꾼1과 짐꾼2는 범죄자와 호위기사로 정했다. 물자는 건조된 식량을 잔뜩 챙기는 것으로 처리했다. 갑작스레 추워지는 사막을 대비하기 위한 물품을 챙기는 것도 있지 않았다.

다행히 금고가 있는 위치는 멀지 않았다. 아무리 동쪽 사람이 아니고 얼뜨기들이 모인 집단이라고는 해도, 사냥꾼 출신이 다수 섞여 있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유사시에 대비하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다.

거점에서 멀지 않고 안전하다고 일컬어진 루트를 통해 적당한 지하 동굴 안에 숨겨뒀다고했다. 그 주변에 유사와 모래 개미가 많아 위험해 보이지만, 길만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사훈의 설명이었다.

그들은 한밤중에 여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아주 높은 창문에서 발렌틴을 닮은 찬연한 금발과 모든 것을 감으로 찍어내는 이의 어두운 피부를 본 것도 같았지만 리라는 별 말 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를 리는 없다고 여긴 탓이다.

둘은 새벽이 당도하기 전에 폐허가 된 신전에서 범죄자를 덜렁 집어들고 사막으로 떠났다. 마차가 움직이는 곳까지는 마차를 탔고, 낙타를 탈 수 있는 곳에서 낙타를 샀다. 리라는 낙타와 말이 그렇게 비싸다는 것을 알고 꽤 크게 충격을 받았다. 리라가 충격받은 얼굴로하지만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낙타를 타면서- 라이즈벨 영지에 있는 말과 배의 가격을 셈하는 동안 낙타는 착실하게 걸음을 옮겼고, 헬레니아를 떠난 지 이튿날 그들은 금고가 있을 유사의 동굴에 가까운 곳에 도착해 야영을 했다.

코가 시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온도 차이에 밤을 덜덜 떨며 보낸 후, 아침이 되었을때.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을 지른 것은 불침번을 선 사냥꾼이었다. 선잠에 들어있던 호위는 번개같이 기상했고, 철야에 이은 강행군에 지친 상단주는 일어나고도 힘들어하다가 간신히 몸을 움직여 텐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헬레니아의 후계자와 라이즈벨의 후계자는 여태까지 볼 수 없던 위대한 자연을 목도한다.

그러니까,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사람이 남길 수 없는 상흔이 남은 풍경을 목격했다는 뜻이다. 바위와 모래 사막만이 한정 없이 펼쳐진 세상을. 아득함을 선사했으나그보다 더 아득한 것은

“낙타가 없어!!”

사훈의 절규였다. 피로 속에서도 귀가 번쩍 뜨이는 외침이었다.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제 머리카락을 땋던 발렌틴이 인상을 찡그렸다. 칼을 반쯤 꺼냈던 리라는 주변을 쓱 훑었다. 바닥에는 핏자국과 모래 위로 무언가가 질질 끌려나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리라는 사훈을 바라보았다. 짧은 회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서 쥐어뜯기고 있었으므로, 리라는 발렌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리라는 제 손을 쳐다보다가 철컥 소리가 나도록 칼을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아주 평범한 어투로 묻는 것이다.

“저희 조난 된 겁니까?”
“…….”
“보면 모릅니까?! 게다가 지도하고 지형도 완전히 달라졌다고. 어젠 해가 다 져서 눈치를 못 챘어…….”

발렌틴은 말하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리라는 그를 만나고나서 이토록 짧은 시간에 다채롭게 표정이 바뀐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사훈은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정보를 취합했다.

리라는 텐트를 접고, 짐을 꾸린 후 물과 육포를 발렌틴에게 내밀었다. 리라의 손을 보던 발렌틴이 조금 인상을 찡그린 채 사양의 말을 내뱉었다.

“지금 먹을 때가 아니야.”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다. 낙타가 없어졌다는 것은 금고를 찾는다손 치더라도 복귀가 어렵다는 뜻이다. 지형까지 달라진 지금에야 말할 것도 없다. 일정 기간 이상 연락이 없으면 헬레니아에서 찾으러 오겠지만 그가 바라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실패를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그 실패가 미래의 양분이 된다고 해도 말이다.

리라는 엄격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억지로 입에 육포를 들이밀었다.

“발렌틴. 기사 수행을 할 때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먹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필요한 때 버틸 수 없게 됩니다.”

정론이었다. 발렌틴은 잠시 리라의 손을 보다가 입을 살짝 벌렸다. 제 손으로 먹겠다고 해도 먹일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을 느낀 듯했다. 리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약하면 먹기라도 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으나 생각일 뿐이었다. 발렌틴은 원인모를 불쾌함 속에서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사훈이 언젠가부터 걸음을 멈추고 짜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요기를 한 후 회의에 들어갔다. 그늘 아래 머리를 맞댄 셋의 회의 주제는 이러했다. 계속 금고를 찾을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불안한 듯이 다리를 떨던 사훈이 커다랗게 외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돈은 갖고 돌아가야지.”

발렌틴은 말이 짧아진 사훈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는 그 큰 덩치를 겁이 난 것처럼 수그렸다.

“낙타도 없고, 지형이 바뀌었다는 건 서식하는 마물이 바뀌었다는 뜻 아닙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온 건 보름 전이야. 보름 밖에 안 됐는데 마물이 영역을 전부 장악했을리는 없어. 여기는 200년 동안이나 모래개미의 서식지였다고.”

타당한 말이었다. 동부를 잘 모르는 리라도 알고 있었다. 모래개미는 군집 생활을 하고, 유사나 모래구덩이에서 지나가는 캐러밴이나 다른 마물들을 잡아먹는다. 영역을 형성하지만 보복성향이 강해서 어지간한 마물들은 침범하지 못한다. 라이즈벨의 바다뱀과 비슷한 성향을 가졌지만 지능이 조금 부족한 정도였다. 리라도 외따로 떨어져나온 것이 아니었다면 바다뱀을 사냥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으니 모래개미라고 다를 것은 없으리라.

사훈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흔적으로 봐선 모래용일 텐데, 지금이면 차라리 잡을 만해. 당신 호위는 마물잡이도 해봤잖아?”
“어떻게 알았습니까?”
“마물 상대 안 해본 놈들은 밥부터 먹잔 소리 안 해.”

천적인 마물은 사막에서는 기껏해야 한둘 정도고, 모래개미를 전부 몰아낼 정도면 큰 전투를 치렀을 것이다. 이 주변의 지형이 변형될 정도로 말이다. 외려 지금이 아니면 금고를 회수할 수 없을 가능성도 높았다.

“안 됩니다.”

비전투원이 없고, 충분한 물자와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면 말이다. 발렌틴은 자신의 약함을 잘 알았다. 그가 강한 것은 서류 위, 펜을 잡았을 때. 저울 위에 금을 올릴 때였다. 리라가 손을 들었다.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저는 바다뱀도 혼자 잡아봤으니 도움이 되긴 할 겁니다.”
“……그냥 하지?”

사훈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엔야크의 사냥꾼은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런 게 있단 말이야? 새삼스러울 것 없는 반응이었다. 라이즈벨에서도 기사들은 종종 그녀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다. 솔리두스가 특이한 것이다. 그들은 대단하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야시장을 가자고 해야겠다.’

곧 축제가 있던가? 리라는 빨리 일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훈은 그다지 루엔야크 다운 사람은 아니었다. 경계가 강하고 배타적인 타입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발렌틴이 제 무릎을 툭툭 쳤다.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해가 손가락 두 마디 만큼 넘어가 그만큼 그림자가 길어졌을 때 발렌틴은 모래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해보죠.”

저울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실보다 득이 많을 거라 여긴 것이다. 계약은 파기되지 않을 모양이다. 사훈이 안도하고 있었다. 계획은 금방 세워졌다. 지반이 단단하고 넓은 곳을 잡아 유인하기로 했다. 진동에 예민하니 요란하게 깨부수면 알아서 나타날 것이었다. 체력을 회복해야 하는데 시끄럽게 굴면 화가 잔뜩 날 터였다.

그렇게 계획을 세운 직후였다.

그들은 진동을 느꼈다. 균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바위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모래가 출렁거렸다. 사훈은 말하기도 전에 위로 도망쳤고, 리라는 발렌틴을 옆구리에 짐짝처럼 끼고 뛰어 올라갔다. 미처 챙기지 못한 짐이 바닥에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졌다.

모래 구름이 피어난다. 구름 사이로 그들은 모래빛의 긴 꼬리를 보았다. 그러나 딱딱한 비늘보다는 물컹한 느낌이 났다. 리라는 눈가를 좁히고 한참을 노려보았다. 모래용의 꼬리가 그들이 서 있던 바위를 쳐서 부수는 바람에 셋은 다른 지대를 찾아서 내려서야 했다. 모래가 입안을 메우고 옷 사이사이로 굴러들어왔다. 발렌틴은 멀미가 난다고 생각했다.잠시 뒤 구름이 가라앉았다. 모래로 황토빛이 된 그들 앞에는 용이 서 있었다.

“지렁이지 않습니까?”
“용인 걸로 하자고.”

항간에서는 토룡이라고 한다고 하니까. 리라가 발렌틴을 내려놓고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짐짝에서 해방된 발렌틴과 사훈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고는 조금 전의 상황에 이르른 것이다..

‘못 잡을 건 아니지만.’

유리한 환경을 선택하지도 못했고, 약점에 대한 이야기도 공유하지 못했다. 용이라면 역린을 찾으면 된다고 여겼는데, 역린을 찾기도 어려워 보였다.

꼬리가 쿵쿵거리며 바닥을 때렸다. 단단한 지반 위에 있던 모래가 물방울이 바닥에 튀기듯이 튀겼다. 리라의 몸이 비틀거렸다. 길이가 건물 두 개는 더 되는 몸이 바닥을 두들겨대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휴식을 취하다가 방해받은 것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상처를 보니 어지간히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것 같았다. 상처의 대부분은 아물지 않고 죽은 피를 한가득 흘려내고 있었다. 녹색 피가 모래를 엉기게 만들었다.

리라는 힐끔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비전투원을 데리고 싸우기는 무리다. 그렇다고 사훈에게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준비된 상황에서 가장 힘을 발휘하는 프로였다. 결국 직접적인 무력은 리라라는 소리였다.

리라는 사훈의 엉덩이를 뻥 찼다. 어떻게 던져놔도 살아나올 것 같은 사냥꾼을 눈앞에 던져두고-복수한다!라는 외침은 한 귀로 흘렸다- 쏜살처럼 튀어나간다. 허벅지에 뻐근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얼굴을 밀어내는 바람이 어지러울 정도로 몰아쳐왔다. 모래용이 몸통을 사훈의 몸뚱이에 들이박을 찰나였다. 리라의 칼이 몸통 부분을 그었다. 물컹거리는 감각과 함께 녹색 피가 뿜어져 나왔다

“리라!”.

리라는 몸을 굴렸다. 리라의 옆에서 치익하는 소리가 났다.

간발의 차였다. 바위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리라는 모래 개미들이 어째서 영역을 빼앗겼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바위 지대에 움푹 파인 구멍이 제법 보였던 이유가 무엇인지도. 하지만 아직도 의문인 것은, 이 일대를 지배하는 모래 개미들이 어째서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냐는 것이었다. 군집생활을 하는 만큼 수가 적진 않았을 텐데.

그 이유를 리라는 얼마 안 가 알게 되었다.

모래용이 고통 속에서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도, 모래가 갑작스레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원인이 된 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리라는 몸을 돌려 바로 뛰었다. 쏴아아. 서쪽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서쪽의 파도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나 이 소리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발렌틴!”

발렌틴은 벌써 몸이 반쯤 밑으로 빠진 상태였다. 리라는 손을 뻗었다. 멀리서 드물게 당황한 낯을 한 발렌틴이 마주 손을 뻗어왔다. 손이 한 번 허공을 헤매는 듯 하더니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나 모래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어이, 나는……?”

그리고 당연하지만, 사냥꾼은 버려지고 말았다.

발렌틴과 리라는 모래 위에 떨어졌다. 모래가 얼마나 많이 쌓여 있었던지 추락의 충격은 대단히 줄어들었다. 딱딱한 바닥 위에 떨어질까 걱정되어 발렌틴을 끌어안았던 탓에 둘의 자세는 꽤 남세스러운 꼴이 되었다. 리라는 전혀 그런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라는 그의 아래에 누운 채 주위를 둘레둘레 돌아보았다. 발렌틴은 그런 리라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리라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발렌틴을 여기저기 툭툭 더듬어 확인했다. 발렌틴은 차마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워졌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없어.”
“정말입니까?”
“없다니까.”
“다행입니다. 발렌틴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아서 걱정했습니다.”

호위로서는 모범적인 태도지만 그, 지켜지는 사람으로서의 품위는 전혀 생각해주지 않고있었다. 하지만 지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발렌틴은 리라에게 바라는 것이 슬슬 줄어들고 있었다.

“여기는 모래 개미들이 거처로 사용하던 지하동굴인 모양인데.”

모래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그보다 단단한 사암이 어지럽게 벽을 이루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뭉개지고 찢어진 모래 개미 사체들이 널려 있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성체부터 유체까지. 이 꼴을 보면 알이 있을 방도 전부 박살 나 있을 터였다. 모래용은 완전히 이 영역을 정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훈의 말대로였다. 이대로 돌아갔다면 다시는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장은 닫혔는지 빛이 없었다. 주변에는 야명주 역할을 하는 돌들이 굴러다녔다. 구불구불 뚫린 동굴 안에는 모래와 먼지 냄새가 침잠해 있었다. 무슨 조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그 누가 모래 개미의 소굴에 들어갈 생각을 했겠는가. 시체는 말이 없는 법이다. 용케 이런 곳에다 금고를 숨길 생각을 했다.

발렌틴은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마물을 마주친 일련의 상황에서 침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호흡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해서 조절한다. 머리에 피가 조금 도는 것 같았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발렌틴은 지도자였다.

그는 크게 심호흡한 뒤 입을 열었다.

“리라,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지 알겠나?”

지하동굴로 내려오는 길은,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아니면 하나라고 했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 금고를 뒀고 안으로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바람은 항상 동굴 안쪽으로 흘러들어오고, 다른 쪽으로 나간다고 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장소만 안다면 금고도 탈출로도 찾을 수 있었다.

리라는 옷자락을 쭉 찢더니 칼 손잡이에 묶었다. 그러더니 요리조리 돌아다니면서 바람이부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곧 찢어진 옷자락이 살랑거렸다.

“저쪽인 것 같습니다.”
“반대로 가면 되겠군.”

리라는 고개를 주억이고 칼을 번쩍 들었다. 개선장군이 깃발을 치켜드는 것 같았다. 위풍당당한 모습에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리라는 그것을 알아챈 것처럼 발렌틴의 손을 낚아챘다. 거부할 틈도 없었다. 리라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호쾌했지만 배려가 없지 않았다. 수 배는 빠르게 걸어갈 수 있을 텐데.

발렌틴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체온이 옮겨붙었다.

한동안 모래를 밟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사박거리는 소리는 천둥처럼 동굴을 울렸다. 둘은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는 아주 훌륭한 대화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어떠한 말도 나누지 않아도, 생각을 정리하고 서로의 의견을 일치하게 만든다. 이 경우에는 조금 달랐지만. 발렌틴은 금에 대해 생각했고, 리라는 바다에 대해 생각했다. 리라는 어쩐지 고향이 그리워졌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축제를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다. 축제를 가야겠어.

굳은 결심의 동행자가 될 사람은, 당연하지만 그녀의 고용주였다.

리라는 입을 열었다. 그녀가 내뱉으려는 말은 이랬다. 축제에 같이 갑시다. 고기와 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숨으십시오.”
“…….”

가려는 길 끝에 모래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래 동굴로 내려오는 길은 모래용이 지나올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끄트머리기 때문에 굳이 올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간 냄새를 맡고 보복하러 왔다는 것이 타당했다.

리라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전부 집어던졌다. 몸에 그나마 매달아뒀던 약간의 짐, 거추장스러운 코트, 허리에 메어둔 칼집. 남겨둔 것은 부츠 끄트머리에 튀어나오는 짧은 칼날과 허리의 단도, 제 손에 쥔 장도長刀뿐이었다. 끝이 부식된 칼 한 자루.

한결 가벼운 차림이 된 리라가 작게 속삭였다.

“약점을 찾아주십시오.”

그녀는 다방면으로 유능한 인재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보 없이 단신으로 거대 마물과 싸우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발렌틴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라는 칼끝으로 약하게 모래용의 옆구리를 긁으며 달려나가며 멈췄다. 아픔을 느낄수록 마물은 리라를 바라볼 터였다.

‘약점이라.’

발렌틴은 골똘하게 생각하다 고개를 기둥 뒤에서 내밀었다. 리라는 피를 뒤집어 쓸까 봐 좀처럼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서 던지는 돌 같은 것으로는 몸에 흠집도 내지못했다. 단도는 날카로웠지만 투척한다면 1회용에 불과하다.

리라가 모래용의 꼬리에 부딪혀 날아갔다. 꼬리인지는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머리인지 꼬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서 리라는 꽤 큰 동선으로 회피를 해야 했다. 리라는 신음을 흘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금방 숨을 삼키며 눕듯이 바닥에 바짝 붙었다. 귓가가 어찔한 파공음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항간에서는 토룡이라고도 불린다던데.’

토룡이라 함은 지렁이란 소리다. 발렌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의 지렁이라 하면 응당 띠처럼 되어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질 않았다. 그는 여기저기 벽을 부숴대는 모래용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리라가 칼을 찍어 뒤트는데 성공하는 순간까지. 마물의 끄트머리 쪽에 흰색 띠가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리라! 지금 네 방향에서 반대에 있는 쪽에서 5헤다르 만큼 떨어진 쪽을 잘라!”

용이건 지렁이건 목이 잘리면 죽는 법이다. 그건 불변의 법칙이다. 마법조차 간섭할 수 없는 법칙.

리라는 한 치의 의심 없이 기둥으로 뛰어갔다. 몇 걸음 만에 기둥의 중간지점을 밟는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를 붙잡고 리라는 몸을 웅크렸다. 모래용이 그녀를 똑바로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한계까지 다리에 힘을 준다. 부츠 밑의 바위가 부스러지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힘을 짜낸 후 기둥을 박차며 리라는 몸에 회전을 걸었다. 머리가 멀리서 휘둘러져 오고있었다.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멀미가 일 정도로 시야가 빠르게 회전했다. 머리 옆을 아슬아슬하게 모래용의 몸체가 스쳐가는 순간, 리라는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칼을 양손으로 꽉쥐었다. 팔에 힘줄이 섰다.

칼이 목에 걸렸다. 흰 띠가 파르르 떨며 모래용의 몸체에 나타났다. 턱하고 걸리는 저항감에 리라는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이대로 근육이 파열되어도 좋으니 잘리기만 해! 리라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뚜두둑. 어디서 난 지 알 수 없는 진동이 팔을 울렸다.

그리고, 녹색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리라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몇 바퀴나 구르고 벽에 몸을 들이박는다. 머리 위로 사암 조각들이 빡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단단한 탓에 피만 조금 나고 말았지만. 쌓여 있던 먼지 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마음 편히 누워있을 틈도 없었다.

모래용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날뛰고 있었다. 단말마나 다름없었다. 머리를 잃은 마물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다. 죽음이 이미 제게 찾아왔음도 모른 채 본능에 따라 고통받고 있었다.

발렌틴이 멀리서 뛰어왔다. 뛰는 속도가 느렸다. 항상 책상 앞에서 서류만 보니까 건강하지 않은 겁니다. 리라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피로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산 성분을 가진 피가 산지사방으로 튄다. 리라는 칼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칼은 끝부분만이 아니라 몸통에 해당하는 날까지 부식되어 있었다. 좋은 칼이었는데. 그녀가 몸을 완전히 일으켰을 때 칼은 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지팡이 역할도 하지 못할 모양이다.

발렌틴이 리라를 부축해서 먼 기둥 뒤로 숨었다. 리라의 한쪽 팔이 늘어져 있었다. 손끝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부러진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칼을 쥐기는 어려울 듯했다.

천장에서 모래가 떨어지고 야명주가 깨졌다. 모래 개미의 사체가 가루가 되도록 마물이 발악했다.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인데도. 리라는 발렌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발렌틴은 리라의 어깨를 감싼 채로 한참을 기다렸다.

마물에게 완전한 죽음이 찾아오기를.

동굴에 고요가 찾아온 것은 추위가 그들의 피부를 더듬으며 기어올라왔을 때쯤이었다. 밖은 벌써 밤이 된 모양이었다. 기분 탓인지, 야명주가 더 밝게 빛나는 것도 같았다. 창백한 얼굴이 피로와 수면에 잠식되고 있었다. 리라의 머리가 춤추는 것처럼 휘몰이 장단을 치기시작하자 발렌틴은 볼을 툭툭 쳤다.

“일어나. 이제 나가야 해.”
“안 잤습니다.”

침부터 닦는게 좋겠다.

“그럼 뭘 한 건데.”
“지렁이도 소원을 들어주는 게 가능한 지 생각중이었습니다.”

발렌틴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략된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것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리라를 바라보던 발렌틴은 고개를 젓고는 리라를 제 어깨에서 밀어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나무 토막을 가져와 그녀의 팔을 부목에 묶어 잘 고정시켜 주었다. 엉성한 매듭이 었지만 툭 떨어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손가락이 땡땡하게 붓는 감각이 있었다.

리라는 눈을 한 번 꿈뻑 감았다 떴다. 달빛이 물에 반사된 것처럼, 야명주가 동굴 안을 밝히고 있었다. 들고 가기에는 너무 크지만 큰 자금줄이 될 것이다. 헬레니아에 또다른 힘이 생기고야 말았다. 그녀는 하품을 크게 하고 갑자기 힘이 생긴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민다.

“갑시다.”

발렌틴은 한숨을 가볍게 쉬더니, 그녀의 손을 뒤집어 손등이 천장을 보이게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리라의 손 아래에 제 손을 놓는다. 마치 에스코트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어 가볍게 쥔다. 옮겨붙은 체온만큼 리라의 손이 식어 있었다. 따끈한 감각이 뒤섞였다.

“가지.”

전리품을 나눌 시간이었다.

§

금고가 있는 곳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이 한짝이나마 달려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큰 입구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는 사람의 걸음으로 다져져 있는 듯 했다. 계단은 없었지만 벽에는 줄이 박혀 있었다. 줄은 새것 같았지만 박혀 있는 못은 상당히 부식되어 있었는데,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통로임을 시사했다. 그들은 금고를 찾기 위해 눈대중으로 훑었지만 다 떨어진 다른쪽 문만 발견했다. 속았나? 야명주를 발견했으니 소득은 있었다. 몇 개만 떼다가 팔아도 발렌틴의 비자금은 산처럼 쌓이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다.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사훈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이라면 대가를 치르게 될 터였다.

다만 사막의 밤은 자비롭지 않다. 밤의 바람이 매섭고 자비 없게 휘몰아쳤다. 리라와 발렌틴은 당장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쉴 곳을 찾았다. 문 옆에 있는 작은 공동으로 발걸음을 옮길 찰나였다. 그들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채 덜덜 떨며 인사를 건네왔다. 사훈이었다.

“살아 있었습니까?”
“너무한 거 아니야?!”

사훈은 아주 억울한 표정으로 자물쇠와 쇠사슬을 휘둘렀다. 위협적인 소리가 났지만 곧 잦아들었다. 리라가 허리에 손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사훈은 억울함을 한참 토로했다. 모래구덩이로 빨려들어간 둘을 찾으려고 모래구멍도 두드리며 걸어다니던 지지부진함, 지형이 바뀐 상태에서 동서남북을 구별해가며 뛰어다니던 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는 당신들이야말로 살아 있었네. 모래용을 잡은 건가?”
“지렁이는 죽었습니다.”
“대단한데. 우리도 단독으로는 절대 마물을 안 잡는데 말이야.”

자물쇠와 쇠사슬을 내려놓고 사훈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습관인 모양이었다.

리라와 발렌틴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옷 사이사이에는 모래가 들어가 버스럭거렸다. 리라의 팔 하나는 제 기능을 못했고, 발렌틴도 그다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둘 다 피로에 찌들어 있었고, 옷은 해지고 짐이라고는 없었다. 노숙자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일단 이쪽으로. 기다리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다.”

덩치가 큰 남자는 오들오들 떨면서 침착하게 문 왼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안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고, 육포와 물을 넣은 걸쭉한 스프가 끓고 있었다. 둘은 조용히 앞에 착석했다. 사훈은 스프를 척척 떠주었다. 그러더니 바닥에 앉아 으스대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들을 위해 자물쇠까지 따두고 곱게 기다렸다고. 금고까지 고스란히 바쳤다 이거야. 제법 믿을만하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사훈은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금고는 보물상자처럼 보였다.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 만든 보물상자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척 봐도 중한 것을 보관하기에 좋아보였다. 요즘 저만큼 상자를 잘 만드는 장인이 없었다. 리라는 둘이 무슨 대화를 하건 신경 쓰지 않고 후루룩 스프를 들이키다가 혀를 다 데었다.

“낙타가 없어서 그랬겠지.”
“그, 그럴 리가! 사람이 모래구덩이에 빠졌는데 어떻게 도망을 가겠어. 사람 된 도리로.”
“그런 것치고는 모래용이 나타나자마자 제일 먼저 도망가던데.”
“크흠, 크흠.”

이젠 발렌틴의 말이 짧아졌다. 아마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겠지만. 약간의 심술인 모양이었다. 발렌틴은 물을 리라에게 밀어주고 천천히 스프를 떠서 먹었다.

“아무튼, 길 안내도 했고 금고도 넘겼으니까 계약은 종료인 거다?”

사훈은 투덜투덜거리며 상자로 다가갔다. 그는 지친 그들을 대신해서 상자를 열었다. 갑작스레 금빛 광채가 쏟아지는 듯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물렸다. 물러날 때와 나설 때를 아는 베테랑조차 이성을 순간 잃어버릴 정도로 대단한 재물들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상자 안에는 금괴와 금화가 가득했다. 종종 비취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끼어 있었다. 아주 아름답게 세공되었는데 척봐도 가치가 아주 높아보였다. 두 번째 상자에는 마물의 부산물이 들어 있었다. 마물의 핵이 크기와 등급 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개수는 아주 많지 않았지만 토벌로도 얻기 어려운 숫자였다. 헬레니아와 라이즈벨의 후계자의 눈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사훈을 향했다. 그는 부끄러워했고, 건장하고 근육이 가득한 남자의 부끄러움은 금세 외면되었다.

세 번째 상자에는 제작연도가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지폐가 몇 다발이나 들어 있었다. 캐러밴의 차용증이나 거래품목 관련한 장부도 몇 개씩 들어 있었는데 지금 있는 상단의 불법장부도 있었다.

리라는 자기도 모르게 스프를 조금 흘렸다.

정말 이보다 더 큰 소득이 없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었다. 솔리두스와 대립각을 가지고 있는 상단 사이에서 주도권을 얻을 수 있었고, 발렌틴이 아버지의 허락 없이 유용할 수 있는 자금도 생겼다.

발렌틴은 웃지도 않고 침착하게 제게 들어온 것들을 헤아리고 셈했다. 주판을 튕기는데 남의 십분 지 일만큼의 시간을 쓰지도 않는 상재는 금세 계산을 끝마쳤다.

“금고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군요. 당신들이 모은 것만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만.”
“이전에 쓰던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라 우리가 적당히 탈취했지. 뒤탈도 없게.”
“일을 잘하시는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텅텅쳤다. 발렌틴은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스프를 떴다. 리라는 동질감을 느꼈으나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 졸렸다. 그녀는 다시 헤드뱅잉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발렌틴은 루엔야크의 사냥꾼에게 천벌과도 같은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일부 계약은 지키지 못하셨으니, 추가 계약을 해주셔야 겠습니다.”
“그게 뭔 소리야? 난 이제 자유 아니야? 뭘 못 지켰는데?”

발렌틴이 계약서를 흔들었다. 사훈이 투다다 뛰어와 종이를 노려보았다. 눈이 튀어나올정도로 커졌다. 계약서 끝에는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넷째. ‘을’은 ‘갑’의 길잡이로서 ‘갑’의 안전을 보장한다. ‘을’이 계약서의 네 번째 사항을이행하는데 실패할 경우 ‘갑’은 추가 계약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을’은 추가 계약을 거절할수 없다.

네 번째 사항의 이행여부는 ‘갑’의 의견으로 정해진다.

<솔리두스 상단주 인印>]

악덕 고용주의 추가 계약이 시작되었다.

“이건 사기야!”
“그러게 계약서를 잘 읽으시지 그랬습니까.”
“이봐, 거기 호위! 너도 거기 있었잖아! 어딜 봐도 이게 사기…… 인…….”

리라가 역동적인 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수저를 든 손은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훈은 더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발렌틴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리라를 눕힌 후 불 밖으로 멀어지도록 한 번 굴렸다. 고른 호흡소리가 색색거리며 울렸다. 모포까지 덮어준 후 그는 느리게 웃는 낯을 했다. 상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럼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해보죠.”

솔리두스와 계약해 본 적 없는 어중이떠중이 용병의 최후였다.

길고 긴 비명이 지하동굴을 울렸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낸다. 밤이 깊어갔다.

§

발렌틴과 리라가 새로운 동료-라고 쓰고 노예라고 읽는-를 데리고 헬레니아로 귀환한 건 4일 후였다. 막 그들을 수색하러 나서려던 솔리두스는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둘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발렌틴이 리라에게 월급 반년 치 짜리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사실과 주점 술을 하룻밤 치나 쏜 리라의 통 큰 배포만이 남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