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부터 파란을
w. 레멘
05. 창해滄海
서부는, 귀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 땅의 소유주가 정해지기 전부터 항상 강인한 땅이었다. 영지의 절반 이상이 바다와 맞닿아 있으나 그로부터 온전한 수혜를 받지 못하고 침략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바다로부터 노획한 사냥감의 대부분은 먹을 수 없고, 옷으로 만들 수 없으며 집을 짓는데 크게 도움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각박한 환경에서 서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개인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인으로는 여전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 강한 개인을 하나하나 모아 집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마물의 사냥을 당하는 입장에서 마물을 사냥하는 입장이 되었다. 험난한 풍랑 위에서 마물의 변덕으로 수장되던 사냥감들은 칼과 창을 들고 사냥꾼이 되었다. 마물을 잡아 뱃머리에 장식하고, 거죽과 뼈를 살라내어 교역을 한다. 칼과 법전이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합치될 때까지, 서부는 몸집을 불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불린 몸집의 꼭대기를 차지한 최초의 이름은 지금의 이름과 같지 않았다.
그것이 라이즈벨에게 강함을 요구되는 이유였다.
베일은 먹구름이 잔뜩 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즈벨과 맞닿은 바다는 날씨가 좋든 나쁘든 험난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딱히 새삼스러울 것 없는 하루기는 했다. 그러나 베일이 바닥을 쓸고 닦던 손까지 멈춘 것은 누군가가 떠올라서였다. 몇 달을 넘어 해에 가깝도록 자리를 비운 제 주인 때문이었다.
매일 잘 닦아둔 창문 너머에는 파랑이 일어나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험악한 기세에 괴물사냥꾼들이 모두 배를 붙들고 항구로 돌아왔고 선원들은 배를 단단히 묶어두느라 씨름하고 있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바다 한켠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종종 번쩍거렸다. 등대의 불빛이 훤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부르러 갈 때까지만 해도 베일은 라이즈벨의 영주가 제 후계자를 내쫓으리라-대외적으로 보기에는- 생각지 않았다. 수행을 목적으로 떠난다고 해도 오래 자리를 비울 것이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리라 라이즈벨에게는 형제자매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이 땅을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높으신 분들 생각을 제가 어찌 알겠는가. 종은 종대로 살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매몰차게 떠난 자신의 주인이 태어난 땅으로 편지 한 장 부치지조차 않은 것에 있었다. 그녀에게 섬세함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지만 매정한 이는 아니었다. 단순히 강하기만 했다면 그녀에게 매료된 이들이 이토록 많지는 않았으리라.
야멸찬 주인은 종복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객지 생활이 제법 즐거운 모양이었다. 야속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옆에 있었다면 어찌 이러시냐 한 소리쯤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멀리 있는 주인에게 종이 할 말이라고는 없었다. 대신 그느깊게 생각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베일이 리라의 시종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래이든 라이즈벨이 아닌 리라 라이즈벨의 종복.
라이즈벨은 충성을 상속하지 않는다.
브래이든 라이즈벨에게 충성을 바친 자가 리라 라이즈벨에게 충성을 바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후계자의 자질이 부족하면 가주의 가신들을 인계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라이즈벨의 후계자들을 더 압박하고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륙에 넷밖에 없는 거대 영지의 주인. 허투루 주인을 정할 수는 없다. 애셜을 제외하면 그에게 명령할 이가 없을 만큼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라이즈벨에게 무력을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
그러나 이미 리라 라이즈벨은 강함을 증명했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아무리 후계자가 유하다고 해도,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보여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베일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아주 덩치가 큰 남자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몸을 구기며 방으로 들어왔다.
“베일님, 주인의 방에서 불경합니다.”
“지금 불경한 건 에티아 경입니다.”
제가 한 건 청소고 경이 한 건 침입입니다. 아시겠어요?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에티아는 약간의 실망을 안고 몸을 바르게 했다.리라의 방은 리라가 머무를 때는 규칙성 있는 어지러움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지금은 시종인 베일 덕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부재는 명징하게 태가 났다.
그는 익숙하게 아쉬움을 감췄다.
“그렇습니까? 아무도 없으니 주인의 칼이라도 꺼내서 쓰다듬으실줄 알고 그만.”
“에티아 경은 그렇게 하시나봅니다?”
“크흠.”
“……앞으로 절대 저 없이 출입하지 마세요.”
베일은 보무도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에티아를 나무랐다. 에티아는 라이즈벨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종자지만 두려움 하나 없었다.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제 주인이 얼마나 실망할까…… 그렇진 않지 아무래도. 그는 리라의 성정을 떠올린 후 생각을 고쳤다. 리라가 있었다면 이 방 안에 에티아가 저렇게 요란스럽게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기척을 한참 전에 느꼈을 테니까.
모든 기사가 그렇지는 않을진대, 에티아는 좀 유난스럽고 엉뚱한 부분이 있었다. 이런 부분이 있어 리라가 그를 옆에 둔 것이 아닌가 싶기는 했다. 만약 에티아가 기사 서임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에스콰이어로 삼아 베일의 속을 썩이는 콤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베일은 진심으로 그를 다행으로 여겼다.
에티아가 뜨끔한 것처럼 가만히 멈춰 섰다. 무뚝뚝한 낯에 그려진 눈에서 당황이 굴러다녔다. 오래도록 소식 하나 없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으나…… 이리 요란스럽게 다녀봐야 제 밑에 사람 통제하지 못한다는 흠이 될 뿐이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만큼 행실을 바르게 하면 좋을 텐데. 그리고 좀 더 정치적이면 좋을 것이었다. 본질을 찌르면 바로 티가 나는 것이, 제 주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걱정은 이해합니다만, 리라 경은 잘 지내고 계세요.”
“편지라도 보내실 수 있을 텐데요.”
“경도 헤매실 시간이 있으셔야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인을 보필해온 시종이 뼈 있는 타박을 하자 결국 에티아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리라는 돌아왔을 때 고생을 좀 해야 할 것이다. 말에 재주가 없으니 칼을 제법 부딪혀야 할 터다.
베일은 방에 있는 전시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라는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고 귀한 사치품을 모으는 취미는 없지만, 그래도 위치가 위치인 만큼 전시할 만한 물건을 하사받기는 했다. 그것을 중하게 여기느냐는 좀 별개의 문제였지만.
전시장은 가운데를 제외하고는 비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아주 귀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애셜로부터 하사받은 아름답고 강한 검. 상자만큼 귀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아 날붙이 한 조각조차 보이지 않도록 숨겨놓았다. 기사라면 전부 탐을 내고, 무기를 수집하는 애호가들이라면 전재산을 바쳐서라도 얻어내고자 하는 무기였다.
과연 리라가 이 검을 원했을까? 본인이 원해서 고른 검이었을까? 하지만 이런 고민은 종의 몫이 아니다. 베일은 그저 제가 모시는 주인이 옷 좀 잘 차려입고 엉뚱한 짓 좀 덜하고 사고 좀 덜 치길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다음 라이즈벨의 주인은 리라 라이즈벨이었으므로.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에서는 빛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베일은 굳이 커튼을 치고, 반짝반짝하게 닦아둔 바닥을 공연히 한 번 더 훔쳤다. 그러고는 에티아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리라의 방에서 내쫓았다.돌아가서 훈련이나 하세요. 리라 경이 돌아왔을 때 두들겨 맞고 엎어질 생각은 아니겠지요? 직속 기사단이 되려면 좀 더 정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축객령이 내려진다.
괴물사냥꾼들은 때가 되면 마물을 사냥하고 돌아오고, 마물의 부산물들은 여전히 가치 있게 거래된다. 금은 순환하고 있고 기사단은 여전히 강고하다. 드물게 재앙도 재난도 없는 시기다. 방황하기에 좋지만, 기르는 종들을 마냥 놓아두는 것은 주인된 도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리라 경, 어서 돌아오세요.”
서부는 평화로웠다.
§
드높고 아름다운 푸른 하늘. 모래폭풍이 잦아들어 풍파가 없는 행상. 어찌나 많은 캐러밴의 바퀴가 지나갔는지 마치 도로는 닳은 것만 같고, 밤은 깊도록 한낮 같았다. 귀한 향신료와 음식이 가게마다 새로운 도전과 함께 쏟아져나오고, 분주함을 틈타 약이 섞여 들어오는가 하면 한몫 잡기 위해 타지로 전재산을 털어 떠나는 이들까지.
금의 흐름은 빛의 흐름만큼 빨라서 그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이들 모두가 눈이 돌아가도록 바빴다.
솔리두스의 핵심인력들이 비명을 지르며 갈려나갔다. 헬레니아와 솔리두스 양쪽에 속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하지만 헬레니아의 후계자인 발렌틴은 딱 죽기 직전까지 혹사당했다. 얻은 비자금을 어떻게 활용할까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책상 앞에서 일하는 일원들은 살아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살아있는 시체라 불리는 마물이 있다던데, 모습이 딱 그짝이었다. 팔이 잘려나가고 다리가 잘려나가도 머리만 파괴되지 않으면 움직인다는 마물 말이다. 누군가가 지금 우리가그것과 다른 게 무어냐 궁시렁댔지만 금방 묻혔다. 그에 대꾸하느니 사인 하나 더 하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데브라는 제 일을 다 하면서도 도박장에서 금을 쓸어모았고-절반을 세금으로 뜯겼다- 에셋을 비롯한 전투인력은 치안대에 차출당했다.
리라는 어땠느냐고? 당연하지만 그녀도 차출당했다. 그녀는 주취자들을 제압하다가 기물파손을 일으키는가 하면 취객들의 충치 치료까지 전담하기도 했다. 많은 항의가 빗발쳤지만 치안대는 리라를 솔리두스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한 번 두들겨 맞은 취객들이 술잔을 잡느니 찻잔을 잡고 교우를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조금 안 되었을 때쯤. 솔리두스의 일이 헬레니아의 일에 비해 압도적으로 줄어든다. 행상이 다소 줄어들고, 너무 빠른 흐름에 터져버릴 것만 같던 금맥의 가닥을 긁어 장부로 만들고,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였다.
항아리 안에서 문화가 뒤섞였다. 그렇다면 지배자로서는 기꺼이 그 변화를 받아들여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가야하는 법.
헬레니아에 축제가 도래했다.
§
헬레니아의 축제는 모래바람과 먼지로부터 시작한다. 색색으로 만들어진 깃발이 세워지고 그 아래로는 간이 노점이 들어선다. 노릇하게 튀겨낸 튀김과 단 간식거리들이 채워지고, 꼬치에 꽂힌 고기와 사막의 생물들이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보석은 햇빛에 반짝거렸고, 겹겹이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찰랑거렸다.
사막 너머의 캐러밴이 무도가와 진귀한 상품을 싣고 찾아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값비싼 비단과 아름다운 베일이 옷으로 탈바꿈하고 금과 동전이 춤을 춘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저녁부터 새벽까지.발렌틴 헬레니아는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창가를 보고 있었다. 집무실이었지만 그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서류에 지독하게 혹사당한 주인을 드디어 놔줄 마음이 든 수하들 덕분이었다. 이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발렌틴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축제 준비가 끝나고, 선포하고 나흘째.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축제의 한중간. 발렌틴은 돌연 업무에서 쫓겨났다.
<헬레니아의 주인이 자신이 기획한 축제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건좀 우습지 않겠습니까?>
시시덕거리던 이와 죽어가며 손을 내젓던 이까지. 그들은 서류를 죄다 빼앗더니 집무실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는 수면향까지 피워 가며-내가 헬레니아의 후계자라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그를 재웠다. 그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것처럼 수면향의 힘을 빌어 내리 이틀을 잤고, 그 결과로 제법 건강한 상태로 회복했다. 감봉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것들을 무서워할 치들이 아니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터오는 동을 바라보던 발렌틴은 시선 끄트머리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사용인 숙소의 창고 옥상이었다. 아주 익숙한 머리카락은 새벽에 잠겨 어두컴컴한 빛깔이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밑에 볼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손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무엇이든 입 안에 넣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
한참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발렌틴은 몸을 일으켰다. 새벽 공기에 차가워진 의자를 밀어내고, 서류 없이 깨끗한 책상을 공연히 쓸어본다. 근래 이토록 깔끔한 모양을 처음 보았다. 책상이 원래 색이었지. 그는 켜둔 램프를 껐다. 방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지만 동이 트기 시작해 사위를 식별할 만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걸어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돌리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열렸다. 그제쯤에는 용을 써도 열지못했던 문이었다.
문 앞에는 바구니가 하나 놓여 있었다. 동전이 가득 들어 불룩한 주머니 하나와 맵시 있지만 귀티가 나지 않는 겉옷 하나가 담겨 있었고, 그 위에는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사를 위한 부하의 선물♡]
바로 찢어졌다. 하지만 겉옷을 내치지도, 주머니를 그대로 두고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헬레니아의 후계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품의 옷을 걸치고 허리에 주머니를 단단히 차서 겉옷 안쪽에 숨겼다. 축제의 소매치기들은 항상 손이 매웠다.
새벽 공기는 아주 찼다. 루엔야크만큼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항상 온난하거나 뜨거운 기후와 마주하는 헬레니아인에게는 꽤 곤혹스러운 기온이었다. 비록 바다가 없어 밤과 새벽이 항상 춥다고 해도 말이다. 한낮이 되면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더워질 거라고 해도. 그는 기온변화에 대해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발렌틴은 잘 정돈된 길을 따라 걸었다. 신발이 부딪힐 때마다 소리를 냈지만 요란하지는 않았다. 그는 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숨긴다고 해서 모를 자가 아니며 그 역시도 스스로에게 그런 재능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고 앞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그동안 그가 찾던 이는 그릇에 담긴 감자를 모조리 먹어치우고 아쉽다는 듯이 손가락을 손수건에 문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발렌틴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대로를 향한 시선에서 보랏빛이 반짝거렸다. 햇빛이 아직 이쪽에 닿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발렌틴.”
시선조차 닿지 않은 부름이었다. 발렌틴은 리라를 올려다보았다. 평이한 낯과 목소리였다. 근 몇 주간 힘겨운 업무를 맡았음에도 얼굴이 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튼튼하기도 하지. 그는 근래 들어 리라의 체력이 제법 부러웠다. 정말로 운동을 할 필요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라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잠을 자기나 한 건가? 리라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기분이 좋아보였다. 빈 그릇을 적당히 아무데나 올려둔 뒤 턱을 괴고, 축제가 열리는 거리를 향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장검은 허리에 메여진 채 불편하게 지붕에 대어 불툭 튀어나와 있었고, 옷 끝자락은 약간 구겨져있었지만 깨끗했다. 밀짚이 좀 묻어 있는 것을 보니 낙타 먹이가 보관된 곳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식사를 했습니까? 너무 안 먹으면 허약해집니다. 저기, 아르네 거리 빵집의 고양이도 고기 좀 먹더니 건강해졌지 않습니까?”
“그냥 눈꼽 낀 걸 떼서 눈을 떴을 뿐이야.”
발렌틴은 그렇게 잘랐지만 리라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 땅에 와서야 건강하지 않음에 대한 척도를 세우고 있었다.
리라는 멀리 축제의 거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내렸다. 턱을 괸 그대로였다. 지상에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빛깔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침이라기엔 지나치게 이르고, 한밤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지난 시간. 발렌틴은 일순간 파도치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헬레니아의 후계자는 입을 연다.
“축제 구경이라도 가겠나?”
후계자로 났기 때문에 그의 표정과 행동에는 항상 계산이 있었다.저울에 값을 올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에서 그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의 제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건만.리라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금 제안을 한 사람이 누군지 잊어버렸나 본데.”
“아, 사주시는 겁니까?”
뭐를? 발렌틴은 되묻지 않았다. 헬레니아에서 그가 살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어조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새벽바람이 리라의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갔다.
§
발렌틴 헬레니아는 제 호위기사의 체력을 잘못 알고 있었다.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건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이토록 신이 났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발렌틴과 리라는 아침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서야 밖으로 나섰다. 누군가의 시선이 음흉하게 와닿았던 것도 같지만, 누구인지 알만 했기 때문에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잉거 마힛습이다.”
“…….”
리라는 입안에 사막전갈 구이를 두 개쯤 우겨넣은 채였다. 발렌틴은 그 입에 작지도 않은 전갈구이가 어떻게 두 개나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리라는 다른 손에 사막의 꽃이라 불리는 선인장 조림꼬치를 세 개나 가닥가닥 끼우고 있었다. 마치 흉기처럼 솟아오른 꼬치들을 보며 발렌틴은 서는 위치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리라와 발렌틴이 1시간 전에 새로 생긴 이색 식당에서 식사를 배 터지게 마쳤다는 점이었다. 제게 더 먹으라고 하면 니글거려서 토할지도 모른다.
그의 호위기사는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소화를 시키는 것이 좋다며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묶은 말총머리는 약간씩만 흔들렸다. 걸음이 일정한 탓이었다. 발렌틴은 뭘 할 작정인지 보자 싶어 리라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 리라는 수많은 노점을 섭렵한 후 노점의 주인들에게 덤을 받아 뱃속으로 직행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발 모든 기사들이 이렇던가? 아닐 것 같았다. 모든 용병들이 이렇던가? 그것도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장담컨대 귀족은 이럴 리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브래이든 라이즈벨의 훈육방식에 의문을 품었다.브래이든이 안다면 들어가지도 않은 관짝을 열고 튀어나올 의심이었다.
사막 전갈을 우득우득 씹고-껍질이 따각따각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입에 물고 있던 나무 꼬치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전갈이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갔다. 빈손으로 입가를 쓱쓱 문지르고는 들고 있던 선인장 조림 꼬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어린아이마냥 눈이 번쩍번쩍하다.
“드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리라는 그와 꼬치를 번갈아보았고, 발렌틴은 다시 거절했다. 리라는 아쉬움 없이 꼬치를 입에 물었다. 예의상 권한 것 같았다.
쨍쨍한 햇볕 때문에 목덜미에 땀이 솟았다. 조림 꼬치를 해치운 리라는 발렌틴의 소매 끝을 붙잡고 간이 노점 사이의 그늘로 끌고 들어갔다. 그녀는 습하고 더운 환경과 그늘 하나 없이 내리쬐는 뙤약볕에 익숙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발렌틴의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리라는 그를 데리고 가면서도 음료를 두 잔이나 샀다. 히비스커스 차 두 잔 주십시오. 물론 돈은 발렌틴의 것이었다.
시원하게 통 안에 담아둔 음료가 발렌틴의 손에 쥐어졌다. 어디선가 의자도 가져왔다. 발렌틴은 자신이 돌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리라의 섬세함이 어디서 왔을지를 생각했다. 세시일까 데브라일까. 정작 리라는 의자에 앉은 발렌틴 옆에서 벽에 기대 선 채 뭘 더 먹을지 고민하는 게 전부인 것 같았지만.
1시간 정도 혹사당한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그는 음료를 입에 댔다.단맛이 났다. 설탕이 너무 비싼 사치재라 정제하는 과정을 줄인 것이 결과로 돌아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설탕의 관세를 높여도 좋겠다 싶었다. 음료는 투명하고 약간 점도가 있었다. 좀 더 투명하게 만들고 색을 넣어도 좋고.
붉은 차양이 드리워진 그늘은 시원했다. 열기를 품은 바람이 그늘 아래로 들어오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그는 땀에 젖은 목덜미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아래 앉아서 축제를 지켜보았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많았다. 노점에서는 목청이 터져라 호객을 했다. 발렌틴은 시야 한구석에서 사람들이 몰린 것도 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불을 뿜는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리라가 구경하고 와도 되겠냐 묻더니 허락을 받자마자 자리를 이탈했다. 잠시 뒤 리라는 흥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발렌틴, 사실 불을 뿜는 용은 인간 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같은 소리를 했다. 발렌틴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했다.
금이 부른 생동감이 거리 전체를 꽉 채우고 있었다. 발렌틴은 솔리두스의 수하들이 어째서 축제를 둘러보고 오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이 고양감을 축제에 나오지 않았다면 알 수나 있었을까.
땀이 전부 식고, 열기가 천천히 수그러들기 시작할 때까지 발렌틴과 리라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어색하거나 할 말이 없어서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때로는 말이 필요하지 않고도 충분한 관계라는 것이 있다. 때로는 숨소리 하나 시선 하나가 더 많은 대화를 하기도 한다.
“덥진 않나?”
불쑥 튀어나온 말은 리라의 차림을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리라는 용병들이나 입을 법한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왔다. 품이 낙낙하게 있고, 질겨서 찢어지기 어려운 천으로 만들어진 상의에 방수 처리가 된 마물 가죽 바지였다. 부츠는 정강이까지 올라왔고, 긴 칼은 허리에 늘어져 있었다. 서쪽의 괴물사냥꾼들의 차림이다.
불편해 보였지만 리라는 새삼스럽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괜찮습니다.”
통기성도 고려한 차림이라며 조심성 없이 옷자락을 펄럭거린다. 발렌틴은 고개를 저었다.
“사고 싶은 건 그게 단가?”
“아직 한참 더 먹을 수 있습니다. 식욕이 화수분처럼 솟아 나올 때는 멈추지 말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발렌틴은 기억을 더듬었다. 최근 오딧세이가 추천한 <욕망의 항아리-식욕과 절제 편>에서 나오던 구절이다. 절제를 하라는 내용인 줄 알았더니.
“책에는 절제하라고 쓰여있지만 사실 반어법이라고…….”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발렌틴은 그녀의 욕심을 방해하지 않았다. 리라는 아주 잘해주고 있었다. 그의 안목을 증명했고, 그의 능력에 신뢰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발렌틴은 리라가 뭔가를 하기를 원할 때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지는 몰라도.
“음.”
리라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드물게 말을 끄나 싶었더니 이내 금방 용건을 내뱉었다. 솔직함과 담백함을 미덕으로 가진 라이즈벨의 후계자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명확하게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야시장에 가고 싶습니다.”
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돈을 모으고 있다고 한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건만 그녀는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래.”
발렌틴은 다 마셔 가벼운 나무 잔을 손안에 쥐었다. 찬기는 전부 스며들어 이제는 숫제 뜨끈한 듯했다.
“밤까지 어울려주시는 겁니까?”
이 말투는 어디서 왔을까? 에셋이겠지.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양분이 되어 변화를 일으키니까. 그래도 적당히 영향을 받았으면 그의 마음이 좀 편하지 않았을까.
리라는 몇 번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나며 스트레칭을 했다. 잔을 가져다가 반납을 하고, 제 배를 몇 번 두드려본다. 음, 충분하군. 발렌틴은 약간 질린다고 생각했다. 리라의 시선이 발렌틴의 뒤쪽에 머물렀다. 더위에 가늘게 묶은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끈같은 것이었다.
“발렌틴과 함께하니 축제도 즐거운 것 같습니다.”
라이즈벨의 축제가 즐겁지 않느냐고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은 라이즈벨이었다. 그녀는 <라이즈벨>을 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증명해야 할 것은 <리라>뿐이다.
“…….”
발렌틴은 리라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굳은살이 가득 잡힌 단단한 손이었다. 거칠고, 때로는 메말랐지만 그 손을 붙잡으면 어쨌든 제 안위만큼은 반드시 보장되는. 햇빛에 타지 않은 그의 손이 리라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단단함은 비할 수 없겠지만 크기는 다른 법이다.발렌틴은 리라의 손을 꽉 잡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리라에게 가볍게 한숨을 쉬어 보인다.
“천천히 돌아다니지.”
화려한 불꽃놀이, 낮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진귀한 물건, 짝을 맞춘 춤사위들이 별과 함께 뿌려지는 야시장이 열리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좀 더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좋을 터였다.
마음 맞는 파트너를 맞기가 어디 쉽던가.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
밤은 약간 시간을 두고 찾아왔다. 노을이 하늘을 태우며 지평선 아래로 숨고, 밤을 준비하는 이들의 분주함이 소란과 함께 지나간 후에. 발렌틴과 리라는 약간 발그스름하게 된 얼굴로 야시장에 발을 디뎠다. 하나는 햇빛에 타버린 탓이었고 하나는 술과 섞인 음료를 마신 탓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신나 보이는 리라의 뒤통수를 보며 발렌틴은 차라리 책상놀음이 더 쉽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다. 체력 생각하지 않고 하루종일 놀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 때나 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는 어린아이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즐거우면 그만인 거겠지. 그 역시도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깃발의 색을 그대로 머금은 색색의 등이 거리마다 걸려 있었다. 달콤한 음료에는 알코올이 들어가고, 음식에는 강한 향신료가 쳐진다.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이 놓여 있던 좌판에는 기묘한 설화를 가진 물건들이 올라섰다. 저주를 내린다는 장신구부터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묘약까지 수상한 것들로 가득 찬 가게들이 눈치를 보며 문을 열었다. 간혹 주먹다짐이 이어지고는 했으나 그 정도는 쉽게 저지된다.
낮보다 적은 돈이, 혹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뛰어오른 돈이 가볍게 거래된다. 그는 상인의 기질을 버리지 못한 채 오가는 많은 것들을 금으로 환산했다. 그를 짐작한 것인지 리라가 그를 불렀다.
“발렌틴. 여기 술을 팝니다.”
“난 마실 생각 없어.”
“하지만 맛있습니다.”
“아니, 언제……. 됐다.”
리라는 발렌틴이 말리기도 전에 양손에 술을 들고 있었다. 발렌틴은 신이 난 것 같은 리라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제가 기획한 축제를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쉽게 취하는 타입도 아니고, 누구처럼 술을 궤짝으로 들이붓는 것도 아니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대신 발렌틴은 빈 속에 먹지 말라고-오늘 내리 리라의 속은 빈 적이 없었지만- 안주거리를 사다 안겼을 뿐이었다.
“오, 제법 잘 마시는 걸 아가씨? 더 마셔보겠어?”
풍채 좋은 상인이 리라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불렀다. 발렌틴도 아는 얼굴이었다. 상인은 힐끔 발렌틴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히죽거리며 잔을 쿵쿵 매대에 내려놓았다. 순서대로 도수가 높아지는 잔들이 가득가득 쌓였다. 발렌틴은 말리지 않았다. 오늘 자신을 끌고다닌 값을 치를 시간이 되었다 여긴 탓이었다.
“자자, 마셔봐. 우리 가게가 데홈 거리에서는 가장 술이 다양하고 많고 잘 한다고. 이건 말이야, 비율을 황금으로 만들어서 황금술이야! 황금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지.”
“정말입니까?”
“암!”
“…….”
자기 가게에서 만들었는데 황금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단 소리를 말하면 좀 의심을 해야하지 않을까. 장사치들에게 익숙해진 줄 알 았더니 아닌 모양이다.
상술에 넘어가 꽤 많은 술을 대접받은 리라는 조금 전보다 더 발그스름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잘 마시는구만. 이것도 하나 마셔보겠나? 우리 가게에서 자랑하는 술인데 말이야. 저승으로 간 친구도 데려올 맛이라고.”
‘같이 저승으로 갈 술이겠지.’
리라는 상인이 대접하는 마지막 술을 망설임 없이 집었다. 전체적으로 맛이 괜찮고, 그녀도 기분이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라는 그 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허무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리라에게 권해진 것은 헬레니아에서도 악명이 높은 선인장으로 만든 도수 높은 전통술이었다. 목구멍이 타는 고통에 리라가 ‘이 술은 암살용입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끝내주는 맛이지?”
상인은 연기를 뿜을 것 같은 리라를 보며 매대를 치며 깔깔 웃어댔다.
“아이구 미안해라. 아가씨가 워낙 잘 마셔서 나도 모르게 줘버렸지 뭐야.”
그런 것치고는 죄책감 하나 없는 얼굴에 호방한 말투였다. 상인은 숙취 음료를 주며 미안한 척 굴었다. 그는 대신이라기에는 미안하지만, 하며 작은 동전을 하나 내주었다. 아이리스가 음각된 동전을 내밀며 데히나 거리에서 이 동전을 내밀면 가격을 후려쳐짐 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발렌틴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돌연 애정 담긴 윙크를 받은 발렌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데브라가 생각났다. 그리고 데브라 짓일 것이다. 옆에서 리라가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데브라 짓이다.
데히나 거리는 데홈 거리 바로 옆에 있었다. 비교적 술과 음식이 많은 데홈과는 달리 온갖 잡화가 가득했다. 색을 먹인 유리를 담은 천 주머니, 주조비율을 바꿔 만든 장신구, 천으로 지은 아름다운 빗주머니 같은 것들이 그들을 맞이한다. 귀한 색으로 만들어진 비단과 예쁜 천으로 만든 머리끈 같은 것들 역시 즐비했다. 대부분은 싸구려였지만 종종 괜찮은 것들이 있기는 했다.
리라는 꽤 부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걸어갔다. 하긴, 서쪽은 동쪽보다는 좀 더 경직된 분위기다. 교역이 헬레니아보다 적어서도 있겠지만 기사와 괴물 사냥꾼들이 한 데 있어 유통되는 물품의 한계가 있다는 점도 있었다.
“원래 축제는 이렇게 뭐가 많습니까?”
“헬레니아에 익숙해진 것 아니었나? 축제가 아니더라도 헬레니아에는 외부에서 들여온 것들이 워낙 많지. 그걸로 먹고 사니까.”
“저희는 마물의 부산물로 만든 것들이 더 많습니다. 가죽을 쓰고 싶어도 독이 있으면 공정에 시간이 듭니다. 아예 못 쓰는 경우도 많고.”
드물게 긴 말에 발렌틴이 제 턱을 쓸어내렸다. 딱히 리라를 후계자로 여기지 않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리라는 충분히 자신을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약간의 술렁임을 느끼는 것이다. 후계자는 원래 자신의 영지를 나가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그녀가 후계자임을 말할 때마다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다.
리라의 발걸음이 종종 쳐지다가 어디선가 멈춰 섰다. 칼과 장신구가 한데 있는 특이한 노점이었다. 리라의 시선이 장신구 쪽에 꽂혀 있었다. 흥미가 있었던가? 발렌틴은 리라가 칼을 휘두를 때를 생각했다. 긴 귀걸이가 그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꽤 보기 좋은 광경일 것이다. 리라가 칼을 반원을 그리며 휘두를 때 그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전이 될 때는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장신구보다는 칼에 더 관심을 가질 줄 알았다. 하지만 자수정을 닮은 눈이 집중하는 것을 보자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졌다
발렌틴은 질문하는 대신 좌판을 살폈다. 발렌틴의 눈에 오래된 단검이 눈에 띄었다. 그는 칼을 다룰 줄 모르지만, 아주 전도유망한 상인의 자제였다. 물건 보는 눈은 그 누구보다도 정확했다.
‘오래된 것 치고는 좋은 칼이군.’
칼집이 낡고 녹슬었고, 보석이 박혀 있던 자리는 전부 빠져 있다.손잡이에 감겨 있는 천은 삭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해졌다. 하지만 슬쩍 보이는 날은 오래된 칼이라기에는 예기가 있었다. 만들어진 년도도 짐작이 갔다. 그 시절에는 칼집을 화려하게 만들어 장식용이라고 속인 뒤 칼을 날카롭게 갈고 무게를 뒤틀어 방심한 상대를 한 번에 죽이거나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도 쉽사리 뽑아낼 수 없게 만들었다.
기사에게 이런 암살용 단검은 필요 없겠지만.
후계자에게는 필요한 법이다.
발렌틴은 단검의 값을 치렀다. 그가 쪼그린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리라는 멀뚱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계산을 마친 것인지 아이리스가 새겨져 있는 동전은 상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놀랐지만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역시 발렌틴은 고기를 좀 더 먹는 게 좋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그렇게 얼굴을 들이민다면 당황해서 다리가 풀릴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발렌틴은 간신히 참았다. 발렌틴은 리라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리라가 먼저 앞서 나갔다.
“원하는 건 샀나?”
“예.”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대답에 발렌틴은 더 묻지 않았다.
“어딜 가는 거지?”
“저쪽에 가보라고 하기에.”
상인이 추천해줬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라는 보폭을 맞췄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사막의 모래가 묻은 바람이 발끝을 따라왔다. 나란히 선 둘의 귓가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헬레니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발렌틴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음색이었다. 춤을 추고 있구나. 발렌틴은 바로 알았다. 빙글빙글 도는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북을 두드리는 소리, 구두가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을 때. 리라 역시 춤이 있음을 깨달았다.
골목의 바로 앞에서 리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발렌틴은 경보하는 것처럼 골목을 도는 리라의 뒤를 따랐다.
소리가 쏟아졌다. 전투가 끝난 뒤의 환호와도 같은 소리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서 규칙적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두 팔이 머리 위로 올라가 부딪혀 소리를 냈다. 박수를 한 번 치고, 바닥을 한 번 구르고, 치맛자락이 꽃이 한 바퀴 도는 것처럼 돌았다. 낮은 목소리가 부르면, 높은 목소리가 화답했다. 그리고 높은 목소리가 다시 부르면, 낮은 목소리가 화답한다. 화음이 투박하게 뒤섞였다.
리라가 굳은 것처럼 멈춰 섰다. 발렌틴은 라이즈벨을 짐작한다. 부딪히는 잔에 쏟아지는 맥주와 거품,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쿵쿵 밟고, 뿔고동 소리가 나는 한 가운데에서 호-레이하며 외치는 바닷사람들의 노래. 줄을 서 춤을 추는 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리라의 손을 불쑥 잡아 끌었다. 발렌틴의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뭘 하고 있어요? 춤을 춰요!”
그 누구여도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끌려들어간 리라와 발렌틴은 서로를 찾을 틈도 없이 어색하게 춤을 시작했다. 손뼉을 두 번 치고, 한 바퀴를 돌면서 파트너와 자리를 바꾼다. 팔짱을 끼고 다섯 번을 돌고 나서는 다시 머리 위에서 박수를 친다. 그러고는 파트너에게 인사를 하고 짝을 바꾼다. 다음에 또 봐요! 안녕하세요. 인사가 익숙하게 흩어졌다.
발렌틴은 뚝딱거리며 춤을 익혔다. 리라는 아주 능숙하게 춤을 익혔다. 부르는 말과 답하는 말을 익혀 세 번째 짝이 바뀔 때는 그들 역시 부르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서너번 짝이 더 바뀐 후, 발렌틴과 리라가 얼굴을 마주한다.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 춤에서 보기 드문 예의바름이라 주변에서 어머, 젊네! 하면서 깔깔 웃는 소리가 났다. 리라가 눈을 데로록 굴렸다. 발렌틴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인사부터 합니까?”
“됐어.”
춤이 다시 시작된다. 손뼉 두 번. 발렌틴 소리가 약합니다. 박수 소리가 거기서 거기지. 한 바퀴를 돌면서 자리를 바꾼다. 머리카락이 깔끔한 호를 그렸다. 팔짱을 끼고 다섯 번 턴. 리라, 너무 빠르다. 발렌틴은 운동을 좀 해야 합니다. 머리 위에서 박수를 친다.
둘은 파트너를 바꾸기 직전에 멈춰 선다. 인사를 하기 위해 가볍게 허리를 숙인다. 한쪽은 기사의 예를 따르고, 한쪽은 상인의 예를 따르고. 그리고 허리를 일으켜 눈을 마주하려는 순간이었다.
펑!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춤이 잠시 멈춘다. 파트너를 앞에 두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격식은 없고, 박수 소리가 드높고, 템포가 빠른 굽소리가 뱃사람의 발걸음처럼 울려 퍼지는 즐거운 춤이었다. 하얀 뺨 위에 쏟아지는 불꽃놀이의 빛깔이 마치.
발렌틴은 상기된 볼이 그저 술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도록 햇빛에 시달려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사람이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현재만큼 반짝거리는 것은 없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은 어딜 갔는지 웃는 낯이 호쾌했다. 발렌틴. 잡힌 손에서는 답지 않게 맥이 정신없이 뛰는 것만 같다.
‘…….’
리라와 헤어지더라도. 혹여 적이 되고, 다시는 용서하지 못할 불구대천의 철천지원수가 된다 하더라도. 발렌틴은 영원히 이 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리라 역시 그럴 것이다. 말했지 않던가. 때로는 말이 필요 없는 관계가 있다고. 리라가 주먹을 내밀었다. 누가 춤을 추고 대련을 끝낸 것처럼 주먹을 맞댄다는 말인가? 발렌틴은 픽 웃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주먹을 말아쥐고 내밀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가볍게 맞부딪혔다.
리라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