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가 찾아온다
w. 레멘
07. 풍한과 여로
새파란 새벽이었다. 굳은살이 박히고 두꺼운 손이 호롱불에 의지해 편지의 봉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늑대와 얼음, 웅장하고 푸르른 침엽수림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힌 붉은 봉인이었다. 어젯밤 도착한 북쪽의 서신이었다. 애셜에게 패배하여 숨만 붙은 채 살던 패배자들이 뭘 잘못 먹기라도 했는지 그 애셜에 충성을 맹세한 서쪽에 서신을 보내왔다. 짐승을 잡아먹다 기생충에라도 감염된 모양이지. 브래이든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으나 그의 생각은 오만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셜에 충성을 맹세하여 얻어낸 그 영화가 중앙으로부터만 왔겠는가? 그 영화는 누군가 패배하여 바치고, 수탈하여 수여한 것이다.
다만 브래이든은 그 편지를 약간 의외로 여겼다. 현재 북쪽의 지배자는 바뀌지 않았다. 사방의 후계자들의 나이대는 엇비슷하고, 그 누구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브래이든이 제 딸을 풀어준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후계자가 서쪽의 지배자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다니. 건방지다 못해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브래이든 라이즈벨은 겨울바다의 푸르름을 간직한 창을 뒤로 한 채 실링을 뜯었다. 푸른색 공단으로 만들어진 끈이 책상 위에 성의 없이 나동그라지자 둥그렇게 말린 양피지가 풀려나왔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는 일 한 번 없이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편지를 읽었다. 바다의 괴물들과 싸우는 배 위의 기사들은 어둠 속에서조차 눈이 밝았다. 편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라이즈벨의 수장에게 고합니다>
< 북풍이 바닷물을 얼리고, 그에 힘입어 살아가는 살아있는 생물을 얼리는 계절입니다. 영민의 삶이 가장 험난할 때지요. 매해 그렇듯이 겨울만큼 방위를 지키는 가문들의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서쪽에 포함된 광활한 영지 역시 근래 동합하여 시름이 깊으실 텐데 이런 이야기를 전하게 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북쪽은 큰 환난을 겪은 후 부족함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뒤 한 번 바라보지 않거나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여기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외부 출입을 삼가고 영민의 삶을 돌보고 칼과 화살촉을 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북쪽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이겨 낸 철은 얼어붙어 깨지는 대신 살아남아 아플 정도로 벼린 것들로 가득합니다. 언젠가 날카로움을 자랑하는 서쪽의 철에 비견되어 보이기를 소망합니다.
에둘러 시작하는 말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일이 있어 전하기 면구스럽습니다. 아시다시피 극으로부터 내려오는 바람이 매섭기 짝이 없어 종종 동쪽에 신세를 지고는 합니다. 동쪽의 바람은 메말라 저희의 바람과 비슷한 점이 있어 친근한 부분이 있어 대비하는데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런 상호 동의 하에 동쪽에 발걸음 했는데, 익숙한 낯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자하니 서쪽의 후계자께서 심신이 편치 못하여 자리를 비우셨다 하기에 같은 후계자로서 염려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서쪽도 아니고 동쪽의 금향에서 그를 보니 건강해보여 그 염려를 거두어도 좋을 듯합니다. 금맥의 주인이 될 자가 기사 중의 기사를 아끼는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기도 합니다. 그리 마음 깊게 우애를 나누는 이가 아니라 새삼스럽기도 합니다.
저는 칼잡이가 아니라 활잡이인지라 칼이 향하는 방향을 몰라 함부로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친애로 시작한 방향이 충정으로 변절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화살은 바람을 따라 휘어지지만 칼이 어찌 그렇겠습니까?
다만 베스텔리에 중앙을 가로지르는 친분이 북쪽에도 닿기를 바랍니다. 또한, 서쪽 작은 파도의 안부를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다음에 저의 친우와 함께 같은 자리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를 고대합니다.>
< 배상. 라일란 루엔야크 >
서쪽의 지배자는 팔꿈치를 책상 위에 댄 채 제 미간을 문질렀다. 의자에는 여전히 딱딱하게 앉아 있는 채였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어미와 의도. 브래이든은 제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고요한 새벽에는 그가 낸 소리로 가득 찬다. 그러다가 별안간 멈추고 책상에 놓인 술을 한모금 마신다.
‘별 피곤한 놈이 북쪽의 지배자가 되겠군.’
북쪽은 직설적이고 감각적인 곳이다. 계략보다 정직함이 앞서는 풍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셜이 가장 먼저 패퇴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네들의 땅에서는 승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대한 영지였으나 대비하기 전에 습격하면 그 누군들 패배하지 않겠는가. 브래이든은 기사들이 철갑옷을 벗어던지고 차갑게 벼린 얼음과도 같은 칼을 들어 승리를 셈한 때를 기억했다.
그렇게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북쪽은 저들의 보편을 버리기로 한 모양이다. 원래라면 라일란 루엔야크 같은 성정의 사냥꾼이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브래이든 라이즈벨은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양피지는 구겨짐 없이 깨끗했다. 후계자 주제에 서쪽의 지배자에게 보이기 힘든 노골적인 도발을 보고도 그는 불쾌함보다는 다음을 고민했다. 그는 곧 이 자리에서 내려가야 한다. 세대교체는 그렇게 멀지 않다. 그가 저지른 업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고, 다음 세대는 업을 감당해야 한다. 영민들의 삶과 죽음을 져야 했고, 동시에 칼을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그는 딸을 엄격하게 키웠다. 그것은 다음대를 위한 것이다. 라이즈벨로 자랐으니 라이즈벨에게 보답하라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서임을 받아 영민을 위하고 기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자. 이런 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바다의 풍랑을 타고 매서운 괴물들의 발톱을 쳐내겠는가?
리라에게 딸로서 가지는 애정은 크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기사임을 인정한다. 또한 철이 옅게 품을 수 있는 애정 정도는 있었다. 그것이 만져보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온도라고 해도.
그러니 늑대의 후예 주제에 뱀의 독을 먹고 자란 자와 견주는 것을 예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바다를 앞에 두고 브래이든이 사용인을 불렀다.
“양피지를 가져와라.”
나지막한 목소리에 문밖에서 예, 하고 짧게 떨어지는 격식 있는 목소리가 났다. 새벽잠이 없는 주인을 모시는 집사는 그의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음을 이해했다. 북쪽으로부터 온 서신이 그에게 고민을 선사했음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집사는 북쪽으로 보낼 파발을 준비하는 대신 동쪽으로 보낼 파발을 준비했다.
책임을 지기로 시작했다면 끝까지 져야 하는 법. 어설프게 받아들일 것이라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서쪽 바다의 파도가, 동쪽 사막의 모래에게 책임을 묻고자 했다.
§
겨울의 사막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집과 재산을 날려버리는 험악한 모래폭풍은 찾아오지 않고, 마물들이 동면을 하는 탓에 종종 위험한 상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바람 자체도 거의 불지 않는다. 그래서 헬레니아의 주인들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사막이 보이는 전경을 찾아가기도 했다. 오래되어 쓰이지 않는 모래와 돌의 신전이 보이는, 저울을 든 상행의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해를 등진 땅에는 노을이 빨리 들었다. 바위 사이로 교묘하게 숨겨진 신전은 특정한 방식을 이용하여 이동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헬레니아의 주인이 호위마저 물리고, 가족에게만 이 장소를 알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고색창연한 신전, 금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저울, 그것을 들고 있는 눈을 가린 상행의 신. 헬레니아는 기도하지 않고 그 저울 위에 금과 추를 놓아 무게를 맞춘다. 모래빛 바위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창문을 내다본다. 모래바람에 죄 긁힐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진 창문의 빛은 색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리아나는 주홍빛에 가까운 빛깔들을 헤아렸다. 그 빛은 작은 나무 탁자 위의 금빛을 닮은 수색의 차를 비추고 있었다. 구하기 위해서는 금화를 열 닢이나 줘야 구할 수나 있다고 하는 차였지만 일리아나는 그 차가 식을 때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같이 차를 들어야 할 상대가 앞에 앉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연히 탁자의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나무는 옹이가 만들어진 것처럼 군데군데 긴 자욱이 남아 있었지만 다치지 않도록 공들여 사포로 밀고, 칠을 한 탓에 거스러미 하나 이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제 아들을 생각했다. 언젠가 그 애도 이 자리에 반려와 함께 앉는 날이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장성한 자식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당찬 얼굴 위에 부드러운 웃음이 허밍과 함께 샜다. 그 노랫소리를 몇 분 지속되다가 멈췄다.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온 섀넌 때문이었다.
백금발에 모질이 조금 굵고,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단단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인상은 모래성이 파도에 허물어지는 것처럼 금세 사라졌다. 그는 들고 있던 양피지를 고쳐 안으며 이름을 불렀다.
“일리아나.”
“섀넌.”
오래된 부부가 그렇듯이,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 있을 법도 했지만 둘은 고즈넉한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서로의 이름을 온전하게 부르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존중이기도 했고, 사랑이기도 했다. 사랑만으로 따지자면 부부간의 관계는 서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서쪽에서는 자식을 향한 사랑을 끼워 넣을 수 없었다는 것일 터였다. 일리아나는 그것을 조금 안타깝게 여겼다. 섀넌은 아마 저울에 올려놓고 있겠지만.
그는 식은 차를 내버리고 새롭게 물을 올렸다. 금화 열 닢을 하는 차는 한 번 우리면 금방 맛을 잃어 다시 찻잎을 우려야만 했다. 금화 스무 닢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섀넌도 일리아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둘 다 유복한-헬레니아를 유복하다는 단어로 치부할 순 없겠지만-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것이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치를 경계했지만 경멸하지는 않았다. 돈은 어디선가 돌아야 한다. 소비는 경제의 활성화를 촉진한다. 금화 열 닢을 하는 찻잎을 누가 소모하겠는가? 왕과 영주는 그 소비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었다.
물이 끓는 동안 섀넌은 양피지를 내밀었다. 양피지는 푸른 마물의 피죽으로 감싸여 있었다. 두꺼운 가죽이 두텁게 양피지를 말았고, 그 위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인장이 인두로 지져 새겨져 있었다. 서쪽에서나 볼 수 있는 특산품이었다. 그는 공적인 문서도 아니고 사적인 문서에 가까울 때 이런 가죽을 쓰고는 했다.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 것이다. 브래이든의 젊은 시절은 지금보다 더 다혈질적인 구석이 있었다.
섀넌이 익숙하게 차를 우렸다. 수색이 짙게 유리잔 위로 배어나왔다.
“브래이든인가요?”
서쪽 영주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른다. 그러나 멸시하거나 깔아보는 어조는 아니었다. 같은 위치에 선 자들끼리는 서로를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일리아나는 우린 차에 입을 대는 대신 양피지를 끌렀다. 말려나온 편지는 만들어지지 얼마 안 된 태가 났다.
< 섀넌 헬레니아. 한 번 간섭하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기에 군주의 자리가 어려운 법이지. 그 애가 나와 사브리나를 닮았으니 이를 몰랐을 리 없으리라 믿는다. 용병을 고용했다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할 때는 내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었나? >
“직설적이네요.”
“칼 드는 치들이 그렇지요.”
미사여구라고는 한마디 없이 용건부터 적힌 편지에 일리아나가 가볍게 웃었다. 섀넌의 비유에 웃었는지 아니면 직설적인 부분에서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종종 어린 시절의 소녀처럼 웃는 경우가 있었다. 섀넌은 일리아나의 소녀 같은 당참을 사랑했으므로 그 미소만으로도 어떠한 불쾌함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일리아나가 읽기를 멈춘 다음의 문장을 읽는다.
< 북쪽의 애송이로부터 편지가 오더군. 적어도 그 정도의 체면치레는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어느 쪽에 예의를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 >
브래이든의 편지는 일견 공격적으로 보이는 어투였지만 섀넌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브래이든 라이즈벨은 그의 입장에서 사실을 적시하고 있을 뿐이다. 칼로 살아온 세월이 길고, 섀넌의 앞에서 체면을 차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미사여구가 없을 뿐이었다. 다만 섀넌은 브래이든의 적시가 제법 부당하다고 여겼다. 저울이 맞지 않는 것이다. 아내를 향한 사랑은 딸의 반대편에나 올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에 추를 올릴 거라면 반대편에 무엇을 올릴지 결정해야 하는 법인데, 최악의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영주이자 기사이자 신하이지만 동시에 아버지이기 때문에.
“방황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적반하장격으로 구네요.”
다른 방위의 영주들은 저울에 금화를 올린다며 헬레니아를 종종 멸시한다. 매정하고, 냉정하게 손익만을 따지는 이라고. 하지만 칼을 들어 타인을 향할 수 있는 이들이야말로, 충정을 기반으로 사는 자들이야말로 그렇지 않던가.
다만 섀넌과 일리아나는 편지 하나로부터 많은 것을 읽는다. 영주로서, 상주로서.
일리아나는 늦게서야 차를 한 잔 들었다.
< 후계자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스스로의 다리로 서고, 날을 갈고, 칼을 들 책임이 있지. 해낼 수 없다면 그 자리도 과분할 뿐이다. 이 서쪽까지 들리지 않도록 해라. 내 칼이 향하는 곳은 중앙의 의도로 충분하다. >
동쪽에서 북쪽을 속국처럼 부리려 드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다. 이제와 그들을 추궁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브래이든은 리라를 그렇게 위하지도 않는다. 후계자로서 자격을 입증하길 바랄 뿐이다. 그 역시도, 그들에게 책임을 지울 일은 아니다.
편지는 끝이었다. 편안한 침묵이 섀넌과 일리아나 사이를 채웠다. 둘의 시작은 절절한 사랑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으면 안달이 나고,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걱정하고, 절절한 감정에 숨이 막힐 정도로 원하는 시작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뢰로 쌓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이를 얻으면서 더더욱 두터워졌다. 성벽만치. 사랑은 그렇게도 온다. 사랑은 그렇게도 뿌리 내리기 마련이다.
일리아나는 밤하늘을 비단으로 짜낸 것 같은 머리색을 지닌 아들의 친구를 생각했다. 보라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면 이 애가 브래이든의 딸이라니 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과연 사브리나의 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이 애가 사브리나의 딸인가 싶다가도, 동시에 브래이든의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법 매정하네요.”
“브래이든은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원로의 일각에서는 아이를 가지는 것보다는 방계에서 들이는 것이 낫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군주는 그럴 수가 없겠지요.”
리라는 발렌틴은 느슨하게 만들었다. 타고 나기를 동쪽 영주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날 선 부분이 있는 아들이었다.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된 자격만큼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황금의 후계자는 그렇게 자랐으므로 그렇게 사는 방법만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섀넌이나 일리아나가 해소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림하는 자는 짊어져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리라라고 다를 것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리라는 그와 춤을 췄다.
< 그 이름에 책임을 지지 못할 것이라면, 돌아오라 전해라. >
전령은 감히 마지막 줄의 말을 입으로 읊고 떠났다. 사막의 사람인 척 꾸몄지만 굳건한 기사와도 같은 기세를 내보였다. 터번을 두르고 사막의 옷을 입었다 한들 사막의 사람일까. 그 건방짐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전령보다 리라의 마음이 더 중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얘기할게요.”
섀넌은 헬레니아의 수장이다. 아무리 그가 아들의 친구를 중히 여기더라도 헬레니아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일리아나는 웃었다. 그녀는 발렌틴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아끼는 친구도 그만큼 아꼈다.
창문 밖을 내다본다. 노을이 잠잠해진다. 마치 파도에 집어 삼켜지는 것처럼 일렁거리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섀넌은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일리아나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의 손끝에는 잉크물이 들어 있었다. 마치 칼잡이들의 굳은살처럼, 숫자를 계산하고 황금을 세는 이의 손에는 영광이 있다. 칼을 잡지도 않는데 모래바람에 거칠게 마모된 손바닥이 일리아나의 손을 크게 덮었다.
창문 밖으로부터 꿈틀거리는 인영을 본다. 어쩐지 어린아이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처럼 불쑥거리는 이가 누군지 둘 다 알았다. 그 뒤를 따라가는 상당히 지쳐 보이는 인영이 누군지도.
“저는 세시의 우려를 이해합니다.”
“그래요? 저는 데브라 그 애가 맞다고 생각해요.”
의견은 다소 다르지만 그것이 어떤 골을 만들지는 않는다. 손깍지를 낀 부부의 뒤로 호롱불이 흔들렸다. 향내가 피어오르는 난로와 조금 식은 차, 가벼운 간식거리. 불쾌한 말을 남겨둔 편지를 말아 치운다.
섀넌과 일리아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리라가 솔리두스를 아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그것을 돌려줄 이유 역시 있지 않겠는가? 그들은 상인이었다. 값을 지불 할 때였다.
§
발렌틴과 밤 나들이-라고 쓰고 순찰이라고 읽는다-를 마치자마자 불려온 리라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최근에 했던 일들을 되짚었다. 뭘 잘못했는지, 뭘 실수했는지, 데브라의 도박에 넘어간 적이 있는지, 에셋과 대련을 하다가 연무장 어딘가를 부쉈는지…….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생각보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리라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고민하느니 그 고민을 안겨준 사람에게 질문을 해서 답을 얻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긴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리라는 바짝 긴장한 채 오래되고 갈색빛이 나는 원목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등받이 뒤에 양각된 문양은 등꽃이었고, 손잡이 부근에는 부드러운 나뭇잎이 음각되어 있었다. 동쪽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와 보기 힘든 조각이라 리라는 힘겹게 이것이 누군가가 바친 선물이거나 구매한 물건임을 짐작했다. 그리고 이 의자를 이 방의 주인이 마음에 들어하는 것도 알겠다. 맨질맨질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님맞이용 협탁 위에는 히아신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사막에서 자라지 않는 아름다운 보라색 꽃이었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창문 아래에 얇은 흰색 커튼이 하늘거렸다. 일리아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는 화려하지는 않으나 단아한 미가 있었고, 그녀의 행동 역시도 그랬다.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채워진 방. 통통하게 물을 머금으면 벌어지는 열매와 100년에 한 번씩 꽃을 맺는다는 선인장의 꽃들이 어떤 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지를 본다.
리라는 이제 그 가치를 알았다. 칼과 갑옷과 마물의 머리가 아닌 것들로 장식되어 있더라도.
“일리아나님.”
“차를 좀 들겠어?”
“맛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
살가운 말씨로 대답한 후 일리아나는 리라의 맞은 편에 앉았다. 엷은 리넨 커튼 뒤로 햇살이 쏟아졌다. 눈이 부시지 않아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리라는 흰 찻잔 위의 골든 링을 쓸었다. 미적지근한 온도가 느껴졌다.
일리아나는 리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라일란과 만났지?”
“예? 예?”
“루엔야크의 후계자 말하는 거란다. 장난기가 많아서 발렌틴이 고생하고는 했던 아이지. 동쪽에서 붉은 눈이 보기 쉽지는 않을 텐데.”
“……아.”
동쪽의 일어나는 모든 일은 헬레니아의 손 안에 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들이 모르기는 어렵다. 솔리두스는 상단이자 정보 집단이며, 그들을 부리는 것이 헬레니아이기 때문이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평범하다고 이르기 어려운 이였다. 어딘가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거니, 후계자로서의 감각으로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다만 그 정도로 지위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후계자에 대한 용모파기가 각 영지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추하기가 쉽지는 않다. 뭣보다 그 가벼운 것 같은 태도라서야……. 뒤늦게야 알게 된 리라는 왜 그가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고가 이어지지는 못한다. 일리아나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떨궜다.
“그 애가 라이즈벨로 편지를 보냈더구나.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자격을 보이지 않을 거라면 귀환하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됐지.”
리라는 잔을 부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리아나는 그 노력을 귀엽게 여겼다. 동시에 안쓰럽게 여기기도 했다. 칼을 고수하던 리라가 훅 꺾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휘어질 바에는 부러질 자들은 그대로 부러뜨려버리는 것이 헬레니아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어린 싹을 뽑아버리지 않는 것 역시 헬레니아의 방식이다.
“어떻게 하고 싶니?”
주홍색 찻물 위로 얼굴이 일렁거리며 비쳤다. 리라는 시선을 어디에 두지 못하고 잔 안을 헤집듯이 방황했다. 그러다가 뚝 멎더니 입을 다물었다. 꽉 다문 입은 호흡을 세 번쯤 들이쉬었을 때서야 열렸다.
“제가 뭘 할 수 있습니까?”
날카롭다기보다는 체념의 어조였다. 일리아나는 리라가 살아온 환경을 생각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을 헤아려 이해한다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대신 일리아나는 공감을 선택했다.
“제일 중요한 건 네가 바라는 거란다.”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던 리라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겠다. 리라 라이즈벨의 기원은 서쪽에 있다. 손에 든 칼의 목적은 중앙에 있다. 기치는 기사도이며 삶은 그 흐름으로 향하기에 이것은 일탈이다. 서쪽에서 났으니 당연히 서쪽으로 귀결해야 함에도 정반대의 땅에서 정반대의 삶을 겪고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일리아나는 손을 뻗어 리라가 쥔 찻잔에서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냈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쥔 찻잔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당황해야 할 리라는 생각조차 못한 것 같았다. 손이 다치지 않도록 하나하나 떼어내는 자리마다 따뜻한 온기가 남았다.
“네가 집에 나왔을 때와 헬레니아에 도착했을 때는 기분이 어떻게 다르니? 솔리두스와 함께 했던 시간이 리라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까?”
잉크물이 든 손끝이 리라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솔리두스의 아이들이 너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사고를 치고 다니거나, 헬레니아의 거리를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고 돌아다닐 때 말이야.”
그러고는 별안간 멈춘다. 리라는 제 손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은살이 배기고 흉터가 남은 자국이 부옇게 흐려졌다.
“떠나는 게 옳음을 압니다.”
목소리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치고는 제법 단단한 느낌을 줬다. 이를 악문 것 같은 말이 분절된다.
“하지만, 솔리두스가……”
솔리두스, 금화의 이름을 딴 이름. 온갖 인간의 군상들이 모여 헬레니아의 온갖 곳을 헤집는 단체. 각자가 개성을 가지고 그녀에게 손 내밀어준 둥지와도 같은 곳.
“헬레니아가……”
헬레니아, 동쪽에 군림하는 영지의 이름. 황금의 주인, 상행의 흐름을 거머쥐고 그 위에서 저울을 재는 자들. 이방인에게 관대하고, 다름을 융화의 미덕으로 삼아 손 내민다. 그 뒤의 어둠보다 눈부신 땅.
“발렌틴이.”
발렌틴.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사고를 치면 종종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손을 내밀면 맞잡아주는 사람, 나의 친구.
라이즈벨이라는 이름의 영지에 책임감을 느낀다. 애정이 있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쪽에 사랑을 느끼지 않을 방도가 없다.
해가 동쪽에서 뜨지 않던가…….
“발렌틴이 리라를 신뢰하는 게 닻이 되어줬구나.”
서쪽의 말이 리라를 관통했다. 리라는 고개를 숙였다. 떠날 수가 없어요. 그 말을 삼킨다. 일리아나는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그 말을 읽어내고 답했다. 일리아나가 한 말은 마치 누름돌처럼 출렁거리는 마음을 눌러 파랑이 없도록 만들었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라니 상상할 수도 없는데.
일리아나는 양 손을 들어 리라의 볼을 감쌌다. 따뜻한 체온에 리라가 움찔하고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나는 엄지로 눈가를 문질렀다.
“네가 후계자니 그 행동과 언어에 조심을 기해야 하는 것은 맞지. 하지만 이런 문제는 아직 우리의 몫이란다. 우린 아직 현역이거든.”
장난스럽게 벌써부터 우리 일을 가로채려 들면 못 써, 그녀는 그렇게 웃으며 볼을 꾹 눌렀다.
“자! 고개 들고, 허리 펴고.”
힘 있는 목소리에 리라가 저도 모르게 뚝딱거렸다. 허둥거리는 몸과 함께 일어선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리라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웠다. 일리아나의 머리가 한 뼘 정도 내려갔다. 발렌틴을 닮은 낯이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헬레니아는 낯선 이의 방문을 환영한다. 그 누구도 네가 누구인지 묻지 않을 것이고, 너를 증명하면 이 땅에서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잔의 손잡이가 부서져 떨어져 내렸다.
“머물러도 좋아. 헬레니아의 안주인이자 발렌틴의 어머니로서, 너를 환영한단다. 리라.”
손끝이 축축해졌다. 등이 밭은 호흡을 따라 약하게 들썩였다. 땡그랑하고 구른 도자기 잔을 보며 리라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했더라. 어떻게, 말을 하는 게 가장 좋더라. 리라는 한참 후에야 날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잔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어머, 고마워라. 기대할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리라에게 다시 자리를 권했다. 요즘 발렌틴은 어때? 친구의 어머니로 얼굴을 갈아 끼운다. 숙소는 옮기는 것이 어떻냐는 말을 태연자약하게 한다. 차라리 안주인으로서 한 말이면 체면치레로 거절이라도 해봤을 텐데, 눈에 덜 뜨이지 않겠느냐는 설득이 이어지자 할 말이 사라졌다. 합리적이라 부정할 구석 하나 없었다. 리라는 머뭇거리는 투로 생각해보겠다고 말을 했고, 일리아나는 편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시원하고 달콤한 차를 가져온 시종이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말이다. 도란거리는 대화 소리가 사막의 신기루처럼 피어 오른다.
따뜻하지만은 않은 날씨임에도 말 한마디에 풍한을 가리는 듯하다. 해가 들고 달달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바짝 긴장한 등이 이완되고, 해는 반짝반짝거렸다.
좋은 날이었다.
§
고용주와 고용인과의 관계는 어디까지 선이 그어진 걸까. 친구와 후계자 간의 거리는 얼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리라는 그런 고민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깊은 밤에 혹은 새벽에. 주변에 생각을 지워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발렌틴은 리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발렌틴 헬레니아는, 리라 라이즈벨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의문은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솔리두스는 리라의 것이 아니고, 헬레니아 역시 라이즈벨과는 관계 없으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발렌틴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을 때였다. 해가 뜨는 것과도 같은 아름다운 시간 끝에 밤이 머물고 있었다.
리라는 문을 두드리고 벌컥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다음에 다시 문을 두드린다. 쿵쿵쿵. 발렌틴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낮은 목소리가 방문을 허가한다.
“사과하러 왔습니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쏟아지는 말에 발렌틴이 턱을 괴었던 팔을 삐끗했다. 자세가 좋지 않아서 리라는 저도 모르게 잔소리를 덧붙였다. 자세가 나쁘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발렌틴. 발렌틴은 익숙하게 그 말을 무시하고 제 말만을 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제 진절머리를 넘어 익숙해하는 듯한 태도에 리라는 머뭇거리며 문을 닫았다. 리라는 이 집무실에 자주 찾아온다는 생각을 했다. 밤과 새벽, 아침과 오후. 발렌틴의 모든 시간에 한 번씩 발을 뻗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선을 항상 허용해주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책을 내려놓았다. 누가 출처일지 뻔할 고서가 조심스레 책상 위에 놓였다. 발렌틴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의자에 등을 깊게 묻고 팔짱을 꼈다.
“리라 너는 평소엔 단순해서 그런지 생각을 하면 너무 이상하게 튀어.”
“욕하는 겁니까?”
“그렇게 들으면 그런 거겠지.”
둥근 안경알 너머의 눈은 항상 무기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 눈이 솔리두스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헬레니아의 영민들을 볼 때 어떤 눈을 하는지 안다. 어머니를 볼 때와 아버지를 볼 때 어떻게 눈이 휘는지, 종종 짓는 난감한 표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같은 것들을 안다. 오랜 시간을 겪어온 것이 아닌데도, 날 때부터 피붙이였던 양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네 이름은 리라야. 솔리두스의 그 바보들도 네게 다른 이름을 바라지 않아. 네 이름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놈들은 솔리두스에 없어. 그는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솔리두스는 말하지 않은 것들을 짐작하고 알아내고는 했다. 평소에는 언급하지도 않지만 데브라처럼 줄을 잘 타는 자들은 종종 그런 것들을 입에 올린다. 발렌틴은 그것을 건방질 정도로 능력이 좋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최고의 찬사였다.
“하지만 나는 너를 리라 라이즈벨로 볼 의무가 있지. 여태까지 우린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였지만, 이제는 후계자와 후계자의 관계로 봐야 할 때도 있다. 나는 온전한 네 방패가 되어줄 수 없어.”
툭, 그가 받아온 양피지를 책상 위로 던졌다. 리라는 익숙한 문장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는 확답을 받았다. 손을 쥐었다 편다.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 꽉 쥐었던 주먹 사이로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본다.
“저는 호위 계약을 했습니다. 그게 어떤 방식의 호위든, 당신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고, 위험을 막는다고 기재된 내용이었던 것을 압니다.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이건 어떤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렌틴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하지 않고 천천히 내놓는 말은 많은 고민을 포함한 것처럼 보였다. 리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발렌틴이 느슨해지며 시야를 넓힌 것처럼, 리라는 촘촘하게 시야를 넓혀왔다.
깊게 호흡하고, 내뱉는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이런 일이 또 있다면 그땐 네가 아니라 헬레니아에서 먼저 나설 거다. 당연한 소릴.”
“그래도, 말로 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군주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법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던 이를 알았다. 칼을 언어로 삼아 행위를 내세우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그러니까, 헬레니아는 그녀에게서 새로운 지평선인 것이다. 그녀는 그 앞에서 항상 솔직하고 싶었다. 더 큰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작은 거짓을 놓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더 큰 진심을 숨기기 위해 작은 진심만을 내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비난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안쓰러운 것처럼-반드시 착각이겠지만- 그녀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풀고 책상을 제법 무겁게 두드렸다. 마치 다가오라는 것 같아서 리라는 그의 책상 앞에 성큼성큼 다가와서 섰다. 움츠러든 것처럼 기가 죽어 있으면서 걸음은 여전히 무심하고 당당한 면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배어 나오는 뻔뻔함. 당당함보다는 뻔뻔함에 가까운 것. 발렌틴은 리라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 상황은 유기적이고, 하나로는 어떤 것도 말 할 수 없어. 너를 라이즈벨에 내준다는 것은 헬레니아가 외압에 굴복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헬레니아의 이름을 들고 고작해야 영주의 요구 하나에 너를 돌려보내서야 체면이 서겠나?”
솔리두스가 그래서. 그녀가 그들과 닮아가서. 솔리두스가 제게 속한 것이라서.
“그리고, 부모님 입장에서는 집에 놀러온, 하.”
그는 드물게 표정을 찡그리며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정말로 보기 드문 모습이라-그는 그렇게 격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고, 겉모습을 항상 멀끔하게 차리는 사람이었다- 리라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는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제 얼굴을 쓸었고, 마른세수를 몇 번 한 후에야 말을 마무리했다.
“친구를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으셨을 테고.”
리라의 시선이 곧게 발렌틴에게 머무른다. 대답하지 않을 수 없고, 거짓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른 시선이었다.
“저를 친구라고 생각합니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신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눈이 반짝반짝거리는 것 같다. 착각이다. 그런 식으로 눈빛을 보내는 것은 술이나 새로운 무기나 음식 같은 것들 앞에서다. 리라의 눈은 새벽에 침잠한 자수정과 같은 것이다. 내포물에 빛을 품고 있는 보라색 보석과도 같았다.
“……부하.”
거미줄을 단단히 꼬아만든 실처럼, 유대감의 끄트머리에 닿는듯하다. 명백하게 손 안에 잡히는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잘 지내기만 해.”
이 여로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즐거움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고 있음을 알았다.
“발렌틴, 제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길게 말해준 겁니다.”
“뭐를.”
“덕담을요.”
“내가 그렇게 박했나?”
네. 리라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발렌틴은 불만인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꾹꾹 누른 다음에 뒷짐을 지고 몸을 바로 세웠다. 기사 같은 태도에 발렌틴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태도에 그녀는 웃음기를 덜어낸 목소리를 냈다.
“그럼 이제 운동합시다.”
“지금 자정이야.”
“늘 말하지만, 발렌틴은 운동부족입니다.”
“일하는데 지장 없으면 됐어.”
“하지만 아침마다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그건 운동부족이랑 상관 없……”
“그럼 밤 나들이에라도 동참해주십시오.”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녀를 한참 보던 발렌틴은 한숨을 쉬더니-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다. 리라는 복 달아납니다 라고 했고, 발렌틴은 어느 지역 속담이야? 라고 되물었다- 몸을 일으켰다. 어제도 밤 순찰을 같이 다녀왔으니 힘들 텐데 굳이 그녀의 고집에 어울려주는 것은 일종의 배려였다. 리라는 이 배려를 받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의문을 세는 대신 접어두기로 했다. 채비가 끝나자마자 리라는 창문을 열었다.
“제발 문으로 다닐 수 없나?”
그녀는 형체가 없는 주제에 그 무엇보다 단단한 기반을 읽는다. 그것을 말해준 이의 퉁명스러운 듯한 말투를 안다. 그것이 쑥스러운 건지, 민망한 건지,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아서인지 알 수 없지만.
리라는 익숙하게 발렌틴을 낚아챘다. 그는 거부와 거절을 표하기도 전에 창문에서 1층까지 추락했다. 바닥에 깔려 있던 푹신한 완충재가 그를 받아냈다. 공주님 안기만은 피하겠다고 결사항전한 끝에 얻어낸 쾌거였다. 내가 어쩌다 이 짓에 어울려주게 됐는지……. 발렌틴이 허리를 두드렸다.
리라가 소리도 없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갑시다.”
그렇게 말하는 뒤로 달이 뜨고 있었다.
라이즈벨이라는 집에서 솔리두스라는 쉼터로. 솔리두스라는 쉼터에서 헬레니아라는 중간지점으로. 그리고 끝에는 다시 라이즈벨로 돌아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틴은 리라의 손을 맞잡았다. 훅 당겨지는 힘에 의지해 바로 선다.
시선이 맞닿았다.
“그래.”
여기에는 그녀의 새로운 지평선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여로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