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가 찾아온다

w. 레멘

06. 북풍과 파랑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사람이 이유 없이 죽어나간다는 흉흉한 소문이었다. 저기 옆 도시에서도 하루에 두셋씩 쓰러졌대. 피를 토했다더라, 피부에 반점이 생겼다더라. 쓰러진 지 일주일 만에 눈을 까뒤집고 몸이 뒤틀려 죽었다던가. 어디선가는 갑자기 홀린 것처럼 강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고 했고, 어디선가는 땅 위에서 질식했다고 하기도 했다. 소문은 하나의 뼈대를 가지고 사방으로 퍼졌다.

그 뼈대는 하나였다. 이유 없이, 사람이 죽는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소문은 베스텔리에 전역에서 퍼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같은 뼈대를 가진 소문이 돈다. 바람을 타지 않았고, 사람을 타지 않았으며 골자가 바뀌지도 않았다.

실제로 죽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죽는다는 소문만이 무성하다. 불안이 조성되고 경계가 커진다. 경기는 위축되고, 의심은 늘어난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진 소문이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소문을 퍼뜨리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감지하는 이들은 돈을 다루는 자들이다. 자금의 유통이 줄어들고, 거래에 개평이 없어지고 인심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동쪽의 지배자는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챘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큰 손해를 입지 않았던 것도 있었으나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셜에 패배한 후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이를 숨긴 이가 헬레니아에 당도할 때다. 겨울의 후계자가 찾아왔다. 그것도 정식으로.

§

세시가 무서운 낯으로 창문 밖을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찾는 이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했다. 현장에 나서지 않는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분노 표현이었다. 그녀는 인사부지만 정보부 일의 보조를 맡고 있었다. 의심받는 일 없이 사람을 만나고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의 동생이 정보부의 요직에 앉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몸이 약해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그랬다.

세시의 옆에 앉아 있던 리시가 찻잔을 톡톡 두들기다가 힐끔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세시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녀의 손에 잡혀 있던 방문객 리스트가 팔랑하고 흔들렸다. 가장 상단에는 베스텔리에에서도 몇 없는 귀한 이름이 차지하고 있었다. <라일란 루엔야크>. 애셜을 제외한 네 방향의 영지. 그 영지 위에 군림하는 이름이었다.

리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담요를 덮어둔 다리 위에 손을 올리고 흐리게 웃었다.

“라일란님은 허가 없이 이 근방을 드나들었잖아. 정식으로 허가를 요청한다는 건 통제에 따르겠다는 뜻이니 외려 낫다고 하셨어.”

“지금 이 땅에 리라가 있는데도?”

“지금이 아니면 이카르드를 선택할 지도 몰라.”

루엔야크는 애셜에 패배한 이후 스스로를 숨긴 채 힘을 기르고 있었다. 온갖 방식을 동원해 유통로를 가리고 있었지만 솔리두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루엔야크로 흘러 들어가는 물자는 이미 8할 이상 손에 쥐고 있었다. 루엔야크는 패배에 안주하고 있지 않다. 그를 목줄 삼아 루엔야크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영지가 헬레니아가 아니던가?

이카르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영지다. 의뭉스럽고,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으나 섣부른 결정도 하지 않고 의견도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패퇴하여 발톱을 숨긴 루엔야크와 충직한 신하가 되기를 자처한 라이즈벨, 황금을 선택한 헬레니아 사이에서 무력도, 금맥도, 굴종도 선택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어떠한 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헬레니아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루엔야크를 내주는 것은 너무 손해를 많이 보는 일이다.

세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라일란 루엔야크는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생각 없는 것처럼 굴지만, 눈속임이었다. 유들유들하게 굴지만 관용적이지 않았고, 관대한 것처럼 굴지만 자비롭지도 않았다. 북쪽의 패배는 당연하며 굴종은 당연한 것처럼 말하지만 빙하보다 더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분노를 품고 있기도 했다.

발렌틴과 친구라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발렌틴은 냉정하지만, 직관적인 부분이 있었다. 호오가 확실하고 제 팔 안의 사람을 가르는 것이 명징했지만 라일란은 루엔야크 사람답지 않게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워낙 장난기가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데브라겠지만,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결이라 발렌틴은 그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실제로 리라를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네.”

세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은 찻물을 버리고 새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주의 처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 행위는 주인을 향한 기망이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리라. 그 엉뚱하고 직진밖에 모르는 것 같은, 발렌틴의 호위. 칼을 든다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만치 동료. 항상 사람을 우선하는 그 강직한 기사를 향한 우려가 사막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강처럼 차올랐다.

리시는 물이 끓는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다리를 내려다본다. 절단해야 했으나 솔리두스의 지원으로 걸을 수 있게 된 다리였다. 헬레니아의 빈부 격차가 만든 빈민촌에서, 헬레니아의 손이 다시 그들을 거둬 키웠다. 그저 여동생이 나은 것으로 만족하는 세시와 기묘한 박탈감을 느끼는 리시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리시는 세시만큼 헬레니아에게 애착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발렌틴의 우려와 걱정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리시는 라이즈벨의 후계자를 좋아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언젠가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

“후계자답게 굴지 않을까.”

바다도 산도 없는 땅에 북풍과 파랑이 몰아닥칠 것이었다.

§

헬레니아의 문화는 마치 만개한 꽃과도 같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코가 아플 정도로 독한 향기를 풍긴다. 수없이 많은 향이 뒤섞여 어떤 꽃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한다. 루엔야크의 후계자는 그 사실에 기꺼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북쪽이 무너진 사이 그 자리를 비집고 힘을 길렀다며 분개했지만 라일란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라일란은 발렌틴을 친구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게다가 루엔야크가 무너진 사이 힘을 기르고 세를 불린 것은 동쪽이 아니다. 개를 자처한 서쪽이지. 굳이 분노를 쏟을 곳이 있다면 라이즈벨로 향하는 것이 맞았다.

바다에 인접한 주제에 마물 때문에 어떠한 수혜도 없어 애셜의 개를 자처한 그 안타까운 땅의 주인 말이다. 호랑이를 닮은 송곳니가 드러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라일란은 휘파람을 불며 데홈 거리를 걸었다. 시간은 저녁때가 다 되어 등에는 불이 들어오고, 가게의 팻말이 열림으로 바뀌고 있었다.

낮에는 음식점을 하고 저녁에는 술집으로 탈바꿈하는 가게들이 문을 덜컥덜컥 연다. 굴뚝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헬레니아에서는 한참 눈에 뜨이는 외형이었지만, 라일란은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식으로 이 땅에 방문 요청을 보냈고, 헬레니아의 주인으로부터 정식으로 허가받았다. 누군가 수상하다고 신고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심지어 헬레니아에는 루엔야크 출신의 사냥꾼들이 제법 들어와 있었다. 북쪽에서 얻은 마물의 부산품 같은 것들을 팔고, 용병으로 입에 풀칠이라도 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그를 사냥꾼들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들거리는 듯한 발걸음으로 라일란은 술을 사들었다. 외상값은 익숙한 사람에게 달아두었다. 헬레니아의 술은 루엔야크만큼 도수가 높았지만 좀 더 달짝지근한 맛이 있었다. 중독될 것 같은 맛이었지만 라일란은 꺼리지 않았다. 라일란은 자기통제의 달인이었다. 그가 입에 술을 털어넣는 순간이었다.

루엔야크의 후계자는 시끄러운 대화 소리를 들었다. 하나의 목소리는 다소 높았지만 우렁우렁하고 또렷했고, 다른 하나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나 누군가의 의견을 명징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마치 신이 난 강아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과 같았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기도 했지만,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하나 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란의 중심지로 다가갔다. 남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탓에 그는 구경꾼들보다 한 뼘 위에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대번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의 친구-종종 누군가는 부정할 것 같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었다. 라일란은 그를 부르는 대신 술을 삼켰다. 사람들은 웃는 낯으로 또 시작이구만! 같은 소리를 하며 히죽대고 있었다.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호위가 이길 거라고 보네. 마히레 거리라고 해도 잘 싸우지 않나. 나도 그런데, 이럼 내기가 안 되잖나. 동전이 짤랑거리며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럼 나도 한 군데에 걸어보실까. 라일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호쾌하게 그려진 미소가 순간 비틀렸다.

브래이든 라이즈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네 방위에 있는 영지의 후계자, 영지의 주인은 그를 모를 수 없었다. 피의 메리 앞에 방패와 검을 자처하며 무릎 꿇은 자를 모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칼이 루엔야크를 겨누고 있음이 분명하기에 더욱이.

그는 두 명의 소란을 그저 지켜보았다. 결국 호위에게 패배한 주인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지른다. 의기양양해진 호위는 가슴을 쭉 폈다. 내기에 쓰인 동전들이 환호와 함께 승자들에게 돌아갔다. 그럼 마히레 거리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당당한 목소리가 행선지를 알렸다. 말리고 싶은 간절한 눈빛으로 호위를 바라보던 주인이 이마를 꾹꾹 누르며 손을 내저었다. 호위는 신난 표정으로 푱하니 튀어나갔다. 제발 시찰만 하고 돌아와, 제발. 그렇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걱정이 붙어있었다.

“흐음.”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사고가 압축된다. 헬레니아, 금맥의 땅. 라이즈벨, 서쪽의 패자. 무력 위에 금이 주어졌을 때 그것은 절대왕권이 된다. 권력이 균형을 갖고 힘을 행사한다. 지배의 전제조건을 넘어, 지배의 완성이라고 할 것이다.

뚜둑,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잔이 우그러들었다. 헬레니아의 영지민보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던 남자가 어이쿠 하며 몸을 숙였다. 마치 잔이 떨어진 것처럼. 그러나 그가 몸을 일으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라일란이 있던 자리에는 달콤한 술 내음만이 널리 퍼질 뿐이었다.

§

헬레니아는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는 인종의 용광로다. 이미 있었던 것들은 헬레니아로 향하고, 새로운 것들은 헬레니아에서 난다. 눈부신 발전은 이런 관용과 융합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문제는 헬레니아가 발전하는 만큼 그 반대급부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빈부 격차는 격화되고, 복지는 그를 따라 배분된다. 압도적으로 집중된 부는 순환의 경색을 맞이한다. 최근에서야 그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나 그마저도 능력 있는 자들에게 한정된다.

동쪽이 왕의 자리를 고사한 것이 아니다. 왕으로 군림할 수 없는 것이다. 왕으로 군림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 이런 격차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루엔야크는 대다수의 물자 유통을 감시, 통제당하는 입장에서도 헬레니아를 상대적으로 덜 경계했다. 기형적인 경제성장은 기반 없이 비석을 세우는 것과 같다. 영주가 직접 나서서 언어를 설파하고 교육 수준을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그 발전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것이 이 결과가 아니던가?

마히레 거리는 헬레니아에서 공적 제재가 어려운 지역에 속했다. 빈민촌과 바로 붙어 있는 거리이자 헬레니아에서도 가장 위험한 범죄 조직들이 자리잡은 곳. 과거에는 주기적으로 치안대를 통해 청소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여 다소 과한 세금을 걷는 것으로 협약을 맺은 헬레니아의 썩은 금덩어리. 그러나 썩었다 한들 금은 금. 갉아내면 그것은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한 노잣돈이 된다.

정식명칭은 마히레 에탐. 헬레니아의 병폐이자 또 다른 금맥. 들어간 자는 몸의 일부를 내놓고 나와야 한다는 악명높은 거리였다. <솔리두스>의 일원들 중 상당수가 이 거리 출신이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마히레의 초입 앞에서 라일란이 사탕의 포장을 뜯었다. 몸이 날랬고 호위를 맡았으며 그 전에는 이카르드와 루엔야크까지 들를 정도로 집념이 있었지만, 라이즈벨의 후계자는 용병도 아니고 암살자도 아니다. 그녀는 온갖 흔적을 남기고 거리를 지나쳤다. 사람이 지나가 흐트러진 쓰레기 조각, 물이 고인 물웅덩이 주변의 습윤한 발자국, 불안하게 남은 빈민촌의 시선.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일반적인 칼잡이는 그녀를 좇을 수 없었겠지만, 그가 누구겠는가?

그는 북쪽의 패자霸者였던 루엔야크의 후계자. 1년의 절반 이상이 눈이 내리며 산에는 만년설이 쌓여 단 한 번도 녹지 않는 땅. 그 위에서 곰과 늑대를 잡고, 마물을 사냥하는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이란 모름지기 사냥감의 위치를 알고 추적하는 능력이 탁월해야 하는 법이다.

라일란은 거침없이 브래이든의 자식이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피식자들이 포식자를 보고 겁을 집어먹어 피하듯이, 빈민촌의 주민들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쑥덕거렸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놓치고 부모의 손에 잡혀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의외인 점은 범죄조직 따까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라일란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럽고 습하고 벌레가 종종 기어다니는 골목을 다섯 개쯤 꺾었을 때 라일란은 피 냄새를 맡았다. 바닥에 쌓인 먼지와 쓰레기 사이로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과 무언가 끌려간 자국, 피에 엉켜 보기 과히 좋지 않은 쓰레기 더미를 발견한다. 그는 발을 더 딛는 대신 허리를 꺾었다. 마치 림보를 하는 것처럼 휘어진 상체 위로 칼이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잘랐다. 짙은 회색 머리카락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일란은 그를 감상하는 대신 바닥을 손으로 짚고 그대로 덤블링해서 가까운 벽을 박차고 담벼락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안정적인 착지가 행해지는 사이로 날카롭고 투박한 칼이 비스듬하게 하늘로 솟았다. 라일란의 턱 밑까지 칼이 날아들었다. 목젖 아래 닿은 칼이 피부에 생채기를 낸다

무스카리를 닮은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냉랭한 표정은 아니었으나 딱딱한 구석이 있었고, 입매는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다. 라이즈벨의 후계자가 브래이든의 젊었을 적 성미를 꼭 닮았다더니 한 고집하는 모양이지. 하긴 그것은 그의 친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발렌틴 헬레니아는 손안의 사람들에게 굉장히 무르지만-솔리두스의 하극상은 루엔야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감안해도 호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발렌틴이 아무리 유하다고 해도 대영지의 후계자였다.

‘라이즈벨의 후계자인 걸 모르나? 그럴 리가 없지.’ 루엔야크를 거꾸로 달아서 먼지도 안 나올 정도로 탈탈 털어놓고 모르면 그것도 나름 열 받을 일이다.

라일란은 힐끔 그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사람이 몇 쓰러져 있었다. 그는 그중 두서넛은 저승으로 향하는 강으로 쓰러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유도 짐작이 갔다. 병폐는 단순히 탈세, 인신매매, 무기 유통에 준하지 않는다. 사회에 불안요소를 심고 그를 이용해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행위 역시 포함이었다.

‘소문이 돌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 때부터 약도 돌고 있을지도.’ 그는 아직 남은 사탕의 막대를 씹더니 경계를 세운 리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힘줄이 선 상처투성이의 손이 그녀를 향해 살랑거렸다.

“안녕, 기사 나리.”

리라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라일란 루엔야크는 그녀의 출신을 확신한다. 굳이 따지자면 9할의 확신과 1할의 혹시 모를 의심을 섞어두었다. 저 눈, 저 기세, 칼이 곧게 뻗는 검로 같은 것들이 스스로를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라일란은 1할의 의심을 종식시키기로 했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빙고. 라일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발렌틴이 때로 질색했던 능글거림이었다.

“이 먼 동쪽까지 왔네. 좌천이라도 당하셨나?”
“……발길 닿는 대로 유랑하는 용병입니다. 멀다고 해서 길을 피하지는 않습니다.”

오딧세이가 들었다면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을 만큼 유려한 발언이었다. 말한 리라도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라일란은 왜 그녀가 놀라는지 몰랐다. 리라는 스스로에게 나중에 상을 줘야한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칼을 갈 아주 좋은 숫돌을 3개 들이로 구매하기 같은. 하지만 발렌틴이 옆에 있었다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도 아니고 플러스 곱하기 마이너스가 되었다고 이야기해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기사임을 부정했지만 먼 동쪽으로 왔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반절만도 못한 대답이다. 이미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말이다.

리라는 손에 힘을 주었다. 라일란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골목에는 벌레가 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달만 떠 있을 뿐이다.

라일란은 두 손을 들어서 항복 표시를 해보였다. 리라는 루엔야크 출신은 두 손을 드는 것이 공격의 표시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사훈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환하자마자 잡혀간 데브라에게 잡혀간 사훈이 월급을 뜯기며-데브라와 도박은 해서는 안 된다- 수신호와 언어 전달 체계를 통째로 수정 당하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조금 전에 헤어진 남자 말이야.”
“제 고용주를 말합니까?”

거기부터 보고 있었나? 칼이 180도 회전했다.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린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의 적의였다. 마치 설산에서 홀로 늑대를 마주한 것만 같았다.

“워워, 진정 좀 해. 난 걔의 친구라고. 못 본 새 호위가 생겼길래 궁금해서 좇아온 것뿐이야.”
“발ㄹ…… 발에게 당신 같은 친구가 있단 말입니까?”

미심쩍은 듯한 눈과 말투다. 라일란은 제 뒷머리를 헤집었다. 하긴 저여도 못 믿었을 것 같다.

“그렇지. 걔한테 나만한 친구도 없을걸? 성격이 좀 밉살스러워야지. 받아줄 만한 사람도 나뿐이라고.”

으스대는 것만 같은 태도에 리라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다만 리라는 그 울렁거림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나만한 친구’도 없다는 점인가? ‘성격이 밉살스럽다?’ 그도 아니라면 ‘받아줄 만한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자신감? 그녀는 고민할 시간도 없이 결론 내렸다.

고용인 입장으로써 고용주가 욕먹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못한 법이다.

“그래서 요즘은 뭘 하고 있길래 호위까지 끼고 다니나? 발렌틴 걔는 호위를 끼느니 귀찮아서 서류 업무만 할 텐데.”

라일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빙긋 웃어 보였다. 마치 비단이 피부 위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그녀는 조금 꺼려하면서도 그와 대화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친구니 뭐니 사칭을 했을 수도 있지 않던가? 여기까지 굳이 좇아와 대거리를 할 정도의 인물이 사기를 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일단, 이름을 알고 있으니 일단 1단계는 통과다.

“발렌틴은 잘 지냅니다.”
“음? 아, 뭐 보기만 해도 알지. 얼굴에 다크서클도 좀 줄었던데 잠을 잘 자나?”

2단계 통과.

“고기도 세 접시씩 먹고, 아침마다 조깅도 합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해가 서쪽에서 뜨나? 그러느니 서류나 더 들여다볼 텐데.”

3단계 통과.

“데브라에게 도박 허가도……”
“혹시 어디 아프대?”

좋다. 최종 합격이다.

친구가 아니면 모를 만한 정보, 그리고 제 감에 의거해 리라는 칼을 내린 후 홀로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라일란은 어린 시절부터 능구렁이처럼 불리하고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었으며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리라 앞에서 그다지 통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외골수에 하나만 보고 직진하는 데다가 엉뚱하기까지 한 사람 앞에서 그의 재능이 맥없이 부서졌다.

허. 라일란이 속으로 혀를 찬다. 이래서구만. 하지만 그는 발렌틴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사람이다. 라일란의 당황은 순식간에 수습되었다. 그의 시작점이 발렌틴의 시작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렌틴은 잘 지냅니다. 고기를 좀 더 먹으라고 했는데 먹는둥 마는둥하고, 잠은 이전보다는 잘 자지만 여전히 적게 잡니다. 데브라는 최근에 도박하다가 감봉당했습니다.”
“여전하네.”

라일란이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칼집에 칼이 찰칵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리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를 돌아 막 꿈틀거리기 시작한 사람 하나를 발로 찼다. 꿈틀거리던 이가 그대로 숨이 끊어진 것처럼 기절했다. 저게 내가 될 수도 있었겠군. 라일란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서, 기사 나리.”
“저는 용병입니다.”
“그래, 기사 나리.”

제 목을 쓰다듬는다.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부만 약간 상한 것이니 금방 낫기야 할 테고, 흉터가 남지도 않겠지만 등골은 여전히 서늘했다.

“서쪽은 분위기가 어때?”

그제서야 리라는 자신이 서쪽에서 왔음을 부정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붉은 눈으로 웃고 있는 이 남자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데도 생각이 미친다.

리라 라이즈벨은 라일란 루엔야크를 올려다보았다. 손끝이 움찔했지만 칼 손잡이가 덜그럭거리는 일은 없다. 덩치가 크지만 날랬다. 몸이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그 힘이 속도로 치환될 정도라는 뜻이다.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발렌틴의 친구라면 곤란하겠지. 다소 오만한 사고로 리라가 입을 열었다.

“모릅니다.”
“떠나온 지 좀 되어서?”
“아닙니다.”
“아! 헬레니아가 좀 서쪽에 비해 화려하긴 하지. 그래, 저울이 반대편으로 기운 거야?”

살아온 세월의 십분지 일도 머무르지 않은 땅에는 격언이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저울이 있고, 그 저울에 얹힌 금의 무게만큼 자신의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라는. 북쪽의 패자敗者는 완피 같은 자라 서쪽에서 온 파랑에게 불편함을 불러일으켰다.

“발렌틴이랑 사이가 좋아보이더라. 안색도 좋아보이고. 정말 운동이라도 나가나? 아무도 안 보이는 데서 하려면 사막지대도 나쁘지 않긴하지.”

와작. 남은 사탕이 산산조각 났다. 라일란은 막대기를 투 뱉었다. 쓰레기 더미 사이로 사탕 막대가 사라졌다. 입안에 선인장 꽃을 졸인 맛이 와득와득 부서져 사라진다. 리라 역시 좋아하는 간식거리 중 하나였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는 호위입니다.”
“걔가 제 사람한테 무르긴 한데 그게 선을 넘어도 된단 뜻은 아니거든…….”

그쪽은 그런 것 같네. 아무리 현 영주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 역시 후계자였다. 보고, 배우고, 익혀 자랐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리라는 그저 제 상황에 대해서만 주워섬겼다.

“저는 발렌틴의 호위입니다. ”

그러시겠지. 그가 동전을 하나 튕겼다. 리라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번개처럼 동전을 낚아챘다. 먼지가 낀 동전에 무엇이 그려져 있을 지는 보지도 않고 알 수 있었지만, 리라는 굳이 그것을 직접 확인했다. 라일란은 그 사이 제법 멋없게 담벼락을 주섬주섬 내려오고 있었다. 어이구 힘들다. 엄살을 부린 라일란은 허리를 툭툭 두드리고 나서는 이내 기지개를 쭉 폈다. 그녀가 공격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발렌틴한테는 말 안 할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쪽이랑 친구가 되면 좋을 것 같거든. 자주 볼 수도 있고.”

숫제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라일란은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무서워서 어째. 난 연약해서 그렇게 칼 휘두르면 그냥 죽는다고. 그녀보다 두 뼘은 클 것 같은 덩치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쪽이 더 이득이거든.”

왜냐하면 나는 라이즈벨의 주인에게 갈 테니까. 실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실각된-정확하지는 않지만- 후계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무어라고. 떠봤자 더 얻을 것도 없었다. 라일란은 이미 충분히 많은 정보를 얻었다. 저렇게 올곧은 사람은 스스로를 숨기고 포장할 줄을 모른다. 라이즈벨도 힘들겠어. 호재였다.

“발렌틴한테 언제 한 번 술이나 한잔 하자고 전해줄래? 꽤 괜찮은 사냥감을 잡았다고 하면 알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떠버렸다. 떠나가는 길에 어후, 여기 어떻게 들어왔더라 길 잃겠다~ 하는 말을 툭툭 떨어뜨려 놓고서는.

북풍의 뒤로 닥쳐온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불안함이 늪처럼 침식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연고 없는 시체로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리라 라이즈벨은 헬레니아의 영지에서 후계자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으므로.

그러나 그때처럼 무작정 칼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리라에게는 발렌틴이 자신과 타협할 것이라는. 그래, 손을 잡아 줄 것이라는 기묘한 믿음이 있었다. 구체화할 수 없고, 말로 뱉을 수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경험이 쌓이기도 전에 번뜩인 직감이었다. 하지만 라일란 루엔야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리라는 손에 쥔 동전을 꾹 쥐었다가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리라는 시체를 밀고, 기절한 약쟁이들을 질질 끌었다. 이만치 들쑤셔 놓으면 하나쯤은 상황을 파악하러 뛰어올 때도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리고 철의 냄새가 났다. 게 중에서 가장 만만한 것을 잡아오는 것이 리라의 이번 일이었다.

고래를 절레절레 저어 불안을 털어낸다. 이전보다는 몰려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불안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리라는 발렌틴을 믿었다.

“…….”

그래도. 집……, 아니. 솔리두스의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이 죽었대. 소문이 피웅덩이를 타고 따라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