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부름
w. 레멘
08. 피에는 이름이 있으매
입김이 눈꽃처럼 피어오르는 날씨였다. 계절은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날붙이 하나 들지 않고도 사람을 벨 수 있었다. 근 몇십 년 동안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겨울이었다. 간신히 개간한 땅은 모조리 얼어붙었고, 기사가 괭이를 들고 나서야 패일까 말까 했다.
보리를 밟을 일조차 없이 추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바다의 날씨는 새삼스러울 것 없이 거칠었다. 갑작스레 번개가 내리쳤고, 지진도 없이 집채 만한 파도가 해안가를 덮치기도 했다. 마물은 그 추위를 맞아 기승을 부렸다. 이전보다 사람의 마을까지 더 깊게 들어와 난동을 부렸다. 영지민과 기사, 괴물사냥꾼들까지 한참 희생되고 나서야 배고픈 마물들을 처리했다.
한 때의 일이 아니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왔으나 봄 역시 보릿고개를 견뎌야 했고, 여름에는 여름에 활동하는 마물이 찾아들었으며 가을의 수확은 예년보다 적어져 배분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아사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치안은 나빠졌고, 종종 폭동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자급자족이 어려웠던 영지에서 이주하는 영민들도 늘었다. 근 3년 동안 세상은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일은 따로 있었다.
리라 라이즈벨은 골목 어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메홈은 괜찮은 거리였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는 곯지 않을 정도의 자산을 가진 영민들이 사는 골목이었다. 일찍 소등할지언정 가로등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 있었고,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도 치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부로 이곳의 분위기도 악화일로를 달릴 것이었다.
틈새가 촘촘한 천으로 코와 입을 가렸으나 쓸모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었다. 여름만큼 부패가 빠르지 않고 시취屍臭가 강하게 풍기지 않는다. 공기로 전파되지 않으며, 타액과 접촉으로 전염되지 않는다.
“리라 경.”
에티아가 그녀의 뒤로 익숙하게 섰다. 리라도 키가 작지는 않은데 그보다 머리 하나 반도 넘게 올라와 있었다. 지나치게 큰 덩치의 기사는 서툴게 천으로 입을 가렸다. 그는 칼로 말하고 칼로 행동하는데 익숙한, 기사 중에서도 행동파였지만 지침은 꼬박꼬박 따랐다. 다만 여전히 의문을 거둘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기침을 몇 번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이런 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어도 해야 합니다.”
리라는 옆에 선 병사 몇몇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은 브래이든과 그녀의 의도였다.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세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통치자의 후계자였다. 보여지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을 리라는 알았다.
시체가 들려나왔다. 천에 뒤덮인 시체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이 분명했다. 붉은색이 천을 물들이기 시작했고, 바깥으로 늘어진 손을 따라 피가 떨어졌다. 리라가 그것을 보고 있자 병사들이 팔을 올려 다시 날랐다.
거리 안쪽에서 영민들이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벽을 치듯이 시야를 차단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차라리 살해당한 피해자였다면 괜찮을 텐데. 골목 안에서 의사가 장갑을 벗으며 걸어나왔다. 주름이 제법 있었지만 아주 건장해보였다.
브래이든 이전부터 영지에서 일해 온 유능한 의사의 표정에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터는 모습에 리라는 아무 말도 듣지 않고서 답을 알았다. 구불거리는 금발이 신경질적으로 흔들린다.
“레이첼.”
“여기까지 나왔나. 그냥 치안 활동이나 하지 그러신가.”
건방진 데다가 툭툭 내뱉는 말투였지만 리라는 그러려니 했다. 그녀는 부하들의 하극상에 아버지보다는 훨씬 관대한 편이었다. 주인이 중심만 잘 잡는다면 조직의 유지도, 질서도 충분히 유지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브래이든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자신을 명확하게 분리했다. 자식이라기에는 제법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레이첼은 뒷목을 주물렀다.
“이전과 같습니까?”
“그래. 온몸에서 물을 쏟고, 피를 토하다가 죽은 것 같더군. 피부가 미라처럼 말라붙은 수준이야. 그런데 전염성은 없어.”
레이첼이 혀를 거칠게 찼다. 리라는 눅눅하게 가라앉는 눈을 했다. 민간신앙은 물론이거니와 의사도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3년째.
리라는 이마를 짚지 않고, 한숨을 쉬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배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그 밑의 영민들은 당연히 불안에 떤다. 그녀는 기사이자 영주의 후계자였다.
“꽤 오랫동안 의사짓 했지만 이런 건 처음이야. 누구는 반점이 생기더니 픽 쓰러져 죽고, 갑자기 몸의 수분이 죄다 빨려 나가고, 갑자기 바다로 뛰어들고……. 공통점이 없는데 죽어나간다는 점만 같군.”
“레이첼님도 사람이시군요?”
“에티아, 네놈은 생각과 말 사이에 필터가 있어야 해.”
“칼만 있으면 됐죠.”
“하이고, 지랄은.”
베스텔리에 전역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전조도 없이 죽어 나가는 이들에게는 성별, 나이, 출생지역, 거주지역까지 공통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니 이를 병으로 규정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소문으로 떠돌던 것들이 서부에서는 늦게 시작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다른 지역 역시도 죽음에 대해 규명해내지도 막지도 못했지만 정보 통제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서부는 정보 통제가 늦었다. 칼잡이들이 먹물에 약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못 할 것이다.
리라는 숨을 삼켰다.
“그래도 계속 확인은 해주십시오.”
“말 안 해도 그렇게 한다. 이게 내 일인데.”
레이첼이 짜증스럽게 담배를 물자 리라는 가볍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레이첼은 혀를 찼다. 그녀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건방진 태도와 하극상을 밥 먹듯이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제약 없이 제 일을 천명했다.
레이첼은 라이즈벨에서 두 명의 영주와 세 명의 후계자를 보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토록 불가사의한 죽음이 줄지은 적은 없다. 그녀는 리라의 어깨가 무거움을 알았지만, 동시에 잘 버텨주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브래이든이 나서서 이 사태를 해결할 만큼 적극적이지 않다.
“…….”
먼발치에 라이즈벨의 성이 보였다. 하늘이 흐려서인지 훨씬 어둡고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골 아프게 됐어. 다 뒤질 때까지 이럴 양인지…….”
모든 사건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규칙은 죽음뿐이었다.
리라는, 어쩐지 그것을 누군가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리라는 덜 마른 머리를 헤집었다. 마른 수건은 마치 강아지 털 말리듯이 물기를 벅벅 닦아냈다. 시종이 본다면 제발 머리카락 정도는 제게 맡겨달라고 간절히 빌만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거친 바닷가와 함께 하며 따갑고 거친 소금을 피부에 얹으며 자란다고 해도. 끄트머리가 상한 머리카락을 한 채 파티에 나가고 가신들의 보고를 받는 것은 지양해야 하는 일이다. 영지 내부에 주인을 돌볼 시종조차 없다고 여겨져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리라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머릿결이 원래 좋다거나 스스로가 느끼기에 중요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리라는 이전과 달리 외형과 차림새를 가꾸는 것을 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워할지언정 매무새를 다듬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그녀는 라이즈벨의 후계자고, 기사들 앞에서 칼을 들어 가장 먼저 달려나갈 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비상시였다. 발전보다는 현상유지를 중시하는 탓에 브래이든과 대립하던 의사와 연금술사들이 한 수 접고 라이즈벨과 손을 잡을 정도로. 괴물사냥꾼이 기사의 공백을 채우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당장의 이득과 원한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아마 영지는 금방 무법지대가 됐을 것이다.
축축한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어느 정도 털어내고 리라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의 위치는 책상에서 다소 멀고 창문에서는 상당히 가까웠다. 위치를 옮기지 않고도 밖이 아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창가에서는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몸에 열이 많고 따뜻한 편이라 리라는 담요를 가져오거나 따뜻한 차를 가져오는 일 없이 멀거니 밖을 바라보았다. 딱딱한 의자 위에 바르게 앉아 등을 댄다. 꼿꼿한 자세에서는 긴장이 느껴졌다. 바짝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날이 서 있음은 분명했 다. 살기를 띄우지도 않고, 칼을 쥐고 있지도 않은데 그랬다. 영지에 감도는 죽음이 모든 기사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갈아버리고 있었다. 심지어 제 아내를 제외한 모든 사안에 무관심해 보이는 브래이든에게서 조차 그런 기미가 느껴졌다.
리라는 어둠 속에 잠긴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했다. 창문이 겨울바람에 이따금 덜컹거리는 소리만 귀를 어지럽혔다. 불이 켜진 길은 대로뿐이었고, 그나마도 듬성듬성했다. 가로등을 평소보다 많이, 오래 켜두자는 의견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밤을 밝히면 치안은 안정된다. 돈과 인력을 아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상황이너무 어려웠다. 라이즈벨 영지의 가로등은 마물의 기름으로 켜지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진행해서 결실을 얻은, 마물의 부산물로 만들어낸 마물의 기름은 마물을 가공할 줄 아는 기술자들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기술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근래 마물은 넘치도록 잡았지만 기술자들이 우후죽순 죽어나갔기 때문이었다. 죽음은 전염병처럼 그들을 쓸었다.
기술자들은 몸을 사리고 문을 닫아걸고는 쑥덕거렸다. 그 누구보다 미신과 관계 없을 것 같던 이들이 입에 불안을 올렸을 때 브래이든은 그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말은 군마보다 빨랐다.
사신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는 생명을 거두러 왔다.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해일처럼 절망적이었고, 막을 수 없는 가뭄이 이끌고 온 비명을 닮았으며 전염병을 끌고 오는 홍수와 비슷한 꼴을 했다. 이것들을 의사는 그것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마라고 불렀다. 연금술사는 그것을 규명해야 할 현상으로 취급했고, 괴물사냥꾼은 마물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라는 그것에 다른 정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3년 사이에 있었던 기현상을 부르는 이름은 많았으나 이보다 더 정확한 단어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 왔다.
죽음이라는 단어면 족했다. 막을 수 없는 재난은 그 단어 이외에는 이름 붙여질 필요가 없었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시선이 흔들리듯이 안으로 미끄러진다. 책상 옆에 기대어놓은 칼을 바라본다. 화려한 장식은 없이 오로지 라이즈벨의 문양만이 각인된 검집이 칼을 감싸고 있었다. 검신은 마물의 뼈를 가공하여 만들었고, 가죽을 이용해 손잡이를 둘렀다. 폼멜은 장식용보다는 실전적으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세모로 깎았다. 길이는 바닥부터 그녀의 허리길이만큼, 손잡이는 자주 쓰지 않아 닳은 흔적이 적다. 그녀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칼이었다. 리라는 종종 그 칼이 자신을 지켜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칼이 어떤 마물을 가공하여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관조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바다의 마물 중 하나였다. 브래이든의 대에서도 토벌보다 방치가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강력한 마물, 백야. 서쪽에서도 백야가 나타나면 몸을 숙이고 배를 물려 종을 쳤다. 모두가 두려워하던 그 마물은, 3년 전 서쪽으로 돌아온 리라에게 죽었다. 흐리고 어둡고 눅눅한 날씨에서 짙은 녹색 눈을 하고서는 그녀를 올려다보던 마물의 마지막 숨이 생생하다.
마물은 죽음을 예고하는 것처럼 뭍을 바라보고 죽었다. 그 뒤에서 백야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던 브래이든은 그것으로 칼을 만들라고 일렀다. 마물은 1년이 걸려서야 칼이 되어 그녀의 손 위에 놓였고, 리라가 꺼림칙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죽음이 백야의 뒤를 따라오는 것처럼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리라는 제 얼굴을 쓸었다. 근래 제대로 수면시간이 줄어든 탓에 피부가 푸석했다. 튼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데도 종종 피로를 느꼈다. 하지만 쉬기에는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어지러이 놓인 보고서를 힐끔 본다. 집중력이 떨어져 꼬부랑거리는 글자가 점점 나빠지는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
리라는 동쪽에서 3년 전에 돌아와 백야를 토벌하자마자 1년 동안의 긴 근신을 당했다. 작게는 라이즈벨 외부와의 단절이었으며 크게는 라이즈벨의 내부까지 단절하는 중징계였다. 브래이든을 닮아 표정을 드러내는 일이 적었던 리라였지만 그 때는 당혹을 감출 수 없었다. 브래이든이 그녀가 떠나도록 허락하고는 적반하장격으로 군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아니었다.
리라는 라이즈벨의 후계자였다. 10대에 수행할 수 있는 모든 후계자 수업을 수행했고, 기사 서임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동쪽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라이즈벨 내부의 가신들과 중대한 회의에 참여해 영지를 운영하는 첫발을 뗐을 것이다. 그러니 막막함과 당혹감을 느낄수 밖에.
그 폭거를 겪으면서도 리라는 가신들이나 영민들 앞에서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타고난 성정 탓도 있지만 후계자로서의 교육 때문이기도 했다. 동요하더라도 티를 내서는 안 된다. 감정보다 이성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자비보다는 엄벌을, 동정보다는 준칙을, 항거 대신 충성을.
그렇다고 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명령에 항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브래이든은 평소보다도 더 완고한 태도로 리라의 항의를찍어 눌렀다. [책임을 모르는 자에게는 자격이 없다.] 그 말 하나 때문에, 리라는 자식이 아니라 가신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 꿇어 처벌을 받아들였다. 동쪽에서 책임을 실감한 후계자는 배운 것을 체득하여 행할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아쉬움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편지 한 장 적어 보내지 못했고, 동시에 한 문장의 글귀도 전달받지 못했다. 전서구는 성 앞에서 되돌려 보내졌고, 베스텔리에 어디에나 상행을 떠나는 솔리두스는 어떠한 물건도 라이즈벨의 성에 들이지 못했다. 동쪽으로 다른 뿌리를 뻗어두고도 물 한 모금 축일 수 없다는 것은 그녀에게 울렁거림과 갈증을 선물했다
리라는 방황하고 나태해지는 대신 칼을 갈고 몸을 단련하고 지식을 쌓기로 했다. 책을 오래보면 곯아떨어져 이마로 책상을 삐걱거리게 만들던 과거를 뒤로했다. 베스텔리에의 역사와 라이즈벨의 연혁을 읽고, 영지를 부유하게 하기 위한 사업을 회의록을 뒤져 낱낱이 캐냈다.
이 땅의 척박함과 고난에 공감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끊임 없는 노력에 대해 이해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렴풋이나마 찾고, 어떤 영주가 될 것인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1년. 무작정 동쪽에 찾아가 칼을 들이밀며 나를 고용하라던 어린 시절과 거리를 두기에 충분할 만큼의 시간이었다.
맑은 공기, 예의를 갖추는 기사들의 칼소리, 잔소리와 함께 매만진 기사단 정복, 다음 영주를 시험하고자 하는 가신들. 가타부타 말 한마디 붙이는 일 없이 자식을 절벽에 세우는 영주와 스스로를 증명할 준비가 된 후계자.
라이즈벨은 새로운 선장을 맞이하여 신대륙으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영지민이 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까? 영지를 버려서 아무도 죽지않는다면……. 하지만 베스텔리에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남부만 소식이 없을 뿐이고.’
머릿속에 생각이 캉캉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아주 끔찍한 낙관부터 아주 달콤한 낙담까지 이어졌다. 리라는 그 생각들과 춤 대결을 해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칼을 들어서 이길 수 있을까 하면. 유감스럽게도. 자존심이 상하지만. 리라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한숨으로 토해내지 않는 것은 그녀의 성정이 그런 식으로 답답함을 토로하지 않기 때문이고, 절망하지 않는 것은 그러기에는 너무 단단한 나무인 탓이었다.
하릴없이 움직인 손을 책상 위에 얹는다. 어지러이 펼쳐진 책상 위에서 편지 하나가 손 끝에 툭 부딪혔다. 리라의 딱딱한 낯이 허물어졌다. 입가가 씰룩거리거나 눈매가 유순하게 변했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다.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분위기가 산화되는 것처럼 가라앉는다. 아직 끈을 끄르지 않은 편지가 그나마 깨끗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리라는 그것을 수면 위로 일렁이는 별빛을 바라보듯이 바라보았다. 그 옆에 놓인 페이퍼 나이프는 어딜 봐도 서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상아로 만들어진 나이프는 귀한 것들 중에서도 보기 드문 상등품이었다. 양각된 문양은 꽤 오래전에 사라진 문명의 것이기도 했다. 리라는 그것을 누군가가 가져다 준 책에서 읽고서 알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아주 귀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용도를 다 못해서야 도구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아마 선물을 준 이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 라고 리라는 멋대로 짐작했다. 그 제멋대로임을 받아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옆에는 유리구슬을 반으로 자른 것과 같은 형태의 문진이 있었다. 짙은 밤하늘과 보석으로 별을 찍어 넣은 문진은 리라가 서류를 처리할 때 종종 쓰였다. 소금기가 나는 바닷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문진이 눌러둔 서류는 날아오르는 일 없이 그 자리에서 펄럭거리기만 했다.
리라는 시선을 옮겼다. 방 한쪽을 차지한 책장이었다. 그 책장에는 원래 단 하나의 물건만 들어차 있었다.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되면서 함부로 보관해서도 안 되는 물건이었다. 리라는 그 물건을 꺼내는 것 보다는 종종 영원히 보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는 않았다. 생각은 언젠가 말이 되고, 말은 언젠가 행동으로 보여지게 된다. 불경이었다.
생각조차 되지 못한 파편을 털어낸 리라의 시선에는 함이 보이지 않았다. 벨벳으로 싸인 함을 그림이 그려진 엽서들이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본 곳부터 시작해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풍경과 짐작하기만 했던 광경이 어지간한 방식으로는 훼손되지 않는 물감으로 그려져 있었다. 강한 충격에도 상하지 않도록 그려낸 것들이었다. 리라는 이 그림 엽서들이 여행을 동경하는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리는것을 알고 있었다. 시중에 풀리지 않은 그림 엽서가 그녀에게만 몰래 보내진 것도 알았다.
리라는 그중에서 바위 사막과 유사流沙 아래를 그린 그림을 좋아했다. 유사로 인해 흘러내린 모래가 쌓인 장소에 햇빛이 먼지처럼 나풀거리는 그림이었다. 리라는 마물이 그 안에 그려져 있었다면 좀 더 멋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장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쪽의 후계자가 가진 수완을 베낄 수는 없어도 어깨 너머로 눈치껏 확인할 수는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뒤에 실제 금화를 붙여놓은 것은 추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고, 리라는 그것에 만족했다. 종종 기분 좋은 감상에 빠져들게 될 정도였다.
함이 위치한 책장의 아래층에는 진귀한 물건들이 미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장식했다. 상아로 만든 페이퍼 나이프와 유리로 만든 문진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안에는 언젠가 그녀가 쓸 수 있을 만한 물건들로 메워져 있었다. 누군가의 도박용 주머니, 잠그면 부수는 방식으로는 절대 열 수 없는 자물쇠, 상대의 이지를 흐리게 하고 기억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물약 같은 것들. 미래를 이야기하는 선물들이었다.
함이 위치한 책장 윗칸에는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내용의 책들이 꽂혔다. <곰 세 마리와 함께하는 고대문명 해석기>, <전생한 내가 사제가 되어 남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이야기>. 누군가의 취향이 비틀어진 것 같은 제목의 책이었고, 리라는 누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이름으로 가진 사람이었다.
리라는 3년의 세월을 빼곡 채운 책장을 바라보았다. 이 책장의 물건들은 1년이 지난 시점에 절반이나 채워졌다.
1년의 근신이 끝나기 며칠 전, 베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아름 짐을 안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에티아는 옆에서 짐꾼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실망한 큰 개처럼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였다. 베일만 조금 흥분한 얼굴로 1년 동안 전달해드리고 싶어 근질근질했다고 말했다. 편지가 몇십 통, 부피가 큰 것까지 포함한 짐꾸러미가 몇 개. 베일이 의기양양한 낯을 하고는 ‘동쪽에서 리라 경을 엄청 신경쓰나봅니다.’ ‘그렇게 신경 써서 뭐합니까…….’ 에티아가 옆에서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을 태연스럽게 묵살하고 우리 주인을 귀하게 대접했다며 기분이 좋아했다. 리라는 정정할까 하다가 때로는 침묵이 더 좋죠. 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고 입을 닫았다. ‘답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데도 계속해서 오더라구요. 그 안경 덩치가 울먹거리면서 맡긴 책만 벌써 몇 권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건 꼭 전달해달라던데요.’ 그렇게 전달된 책은 희귀한 병에 대해 집필해놓은 의학서적이었다. 리라는 안경 덩치까지만 듣고 짐꾸러미를 풀었다. 얼마나 단단히 감싸져 있는지 빵빵하기까지 한 포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녀는 그 안에 무엇이있는지 알 것 같았다. 포장에 <내가 그리울 라이즈벨의 후계자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문장이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무엇을 보냈는지도 알만했다. 솔리두스는 흐려지기에는 너무 개성적인 사람들의 집합이었다.
그리고 편지는. 누가 보냈는지 너무나 뻔해서. 단출하게 실링을 쓴 주제에 그 실링을 금가루로 장식하는 것이 또 베스텔리에 최대 거부다웠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자, 오랜 시간과 거리를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향이 나는 편지지. 리라는 그 편지들을 하루를 통으로 써서 읽었다. 따뜻해서 따끔따끔한 속을 밀어넣고 새벽을 새서 마침표를 찍었다.
몸을 웅크리고 모든 편지를 읽어낸 후, 예쁘게 봉투에 넣어 보관했다.
그러고나서는, 여느 때와 같이 칼을 들고 훈련장으로 나갔다.
역사적인 첫발에 죽음이 찾아왔음에도 단단히 땅을 딛고 섰다.
팅.
손가락 끝이 동전을 튕겼다. 동전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천장으로튕겼다가 그녀의 손 위로 떨어졌다. 얼마나 만졌는지 동전 위의 양각이 닳아 있었다. 하지만 양각이 아이리스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서쪽에서는 보기 힘든 꽃이었다.
‘바뀌진 않았겠지.’
세상에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언젠가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을 후회하느니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낫다. 그녀는 라이즈벨의 후계자였고, 장애물에 온 힘을 다해 부딪힐 줄 아는 사람이었다.
리라는 밤을 지새웠다. 겨울의 밤공기는 새벽을 머금고 더욱 차갑게 손끝을 타고 올랐다. 램프의 불이 일렁거리며 타올랐다.
해결책은 없으나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잠이 부족하여 몸의 패턴을 무너뜨리는 것은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일이많고 충성은 계승되지 않았다. 기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레이첼과 같은 의사들과 연금술사들을 포섭하는 것은 그녀의 일이다.
리라 라이즈벨은 새로운 흐름이 될 필요성이 있었다.
새벽 동이 트고,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이 꺼지고, 영지의 거리 곳곳에 아침을 알리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죽음이 와도 해는 뜨고, 밥은 먹어야 하며,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시종이 방문을 두드린다. 리라는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칼의 손잡이를 붙잡는다. 무거웠다.
“영주님이 부르십니다.”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